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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 평전] 평화·통일 운동의 발자국들정진동을 아십니까.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 99 민중대회 99 민중대회.우측에서 두 번째가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충북 청주 상당공원에 연단이 설치됐다.무대 뒤편에는 '민중생존권 보장,국가보안법 철폐,양심수 전원 석방,인터넷무료바카라민중운동 탄압 중지'라는 현수막이 걸렸다.지나가는 시민들은 행사를 준비하는 청년들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하고 현수막과 피켓 내용을 보기도 했다.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4월 12일이었다.날씨도 날씨니만치 준비하는 이들도 에너지가 넘쳤다.'민중의 기본권 보장과 양심수 석방을 위한 충북대책위원회(아래 충북민권공대위)'가 결성되는 날이다.

마이크를 잡은 장민경은 본행사 전에 있는 문화공연팀을 소개했다.청년·학생들의 재기발랄한 율동과 노래는 행사장의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줬다.연단에 등장한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는 1998년 취임한 김대중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30만 실업자 시대

"오늘 노동자가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 200만 명 이상이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이들의 가족을 합친 숫자는 근 1000만 명은 될 것이다.그 1000만 명이 김대중 정권에 등을 돌렸다."

IMF 체제하에서 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국민의 정부' 경제정책과 노동정책을 비판했다.그 시절 실업자 수가 정진동이 말한대로 200만 명은 되지 않았다.통계청에 따르면 외환위기 사태가 터진 지 2년이 채 안 된 1999년 8월 실업자 수는 136만 명까지 증가했다.

이날의 연설은 정진동을 착잡한 심경에 젖게 했다.그도 그럴 것이 정진동은 1970년대부터 김대중과 교유(交遊)를 하면서 열광적 지지와 비판적 지지 사이의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정진동,<격동의 30년>,2002).

IMF 한파는 비단 노동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농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500만 농민들이 아우성을 쳤다.길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났다.드라마에서도 길거리 노숙자의 애환을 그려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다.국민의 정부는 IMF 체제에 순응하며 노동 유연화(구조조정),자본시장 자유화,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공격적으로 펼쳤다.그 결과 노동자,농민,중소 자영업자의 삶은 질곡에 빠졌다.

정진동은 개회사 말미에 "민중의 힘으로 민중 기본권을 사수하자"라고 목청을 높였다.이날 상당공원에서 결성된 충북민권공대위에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전농 충북도연맹,청년진보당,충북총련(충북지역 총학생회연합)과 좌파학생그룹인 충북학협(충북학생회협의회)이 참여했다.참석자들은 결성식 후 서원대학교까지 행진을 했다.서울에서 전국 민권공대위가 결성된 것은 그해 12월 28일이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9시,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태운 공군 1호기가 성남 서울 비행장을 출발했다.공군 1호기는 9시 45분에 북위 38도선을 넘어 북한영공으로 진입했다.백령도가 오른편 옆구리 쪽으로 내려다보였고,그 위쪽으로 북한 장산곶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북한 땅이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오전 10시 27분,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선회하며 활주로 위에 사뿐히 착륙했다.서울에서 평양까지는 참으로 가까운 거리였다.그때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외쳤다."김정일 위원장이 보인다!"(박선욱,<6.15 공동선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비전향장기수 환송식

▲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53주년 기념행사.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53주년 기념 행사.연설자가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역사적 만남을 통해 '6.15 공동선언'을 이끌었다.선언의 핵심 내용은 남북의 자주적 통일,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연방제안의 공통점 속에서 통일운동 추진,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비전향장기수의 인도적 해결,남북 경제 협력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6.15 공동선언'은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는 조치였다.이 선언에 따라 비전향장기수 송환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사실 비전향장기수 송환 문제는 이전부터 제기됐다.

전 인민군 출신 장기수였던 김영태,김인서,함세환은 1995년 4월 18일 기독교회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우리는 엄연한 전쟁포로로 제네바협정과 정전협정에 따라 이미 지난 1953년 북송됐어야 했다.남북화해의 장을 여는 차원에서나 인도적 견지에서라도 죽기 전에 가족과 친지들이 살아 있는 북녘땅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끝나지 않은 여정>)

비전향장기수와 통일운동 단체의 오랜 염원이었던 비전향장기수 송환이 구체적 결실을 맺게 됐다.비전향장기수 63명이 송환되기 8일 전인 2000년 8월 25일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는 '비전향장기수 환송식'이 열렸다.

비전향장기수 김영태,함세환,박순천,정순택이 초대됐다.청주지역 활동가들에게 익숙한 김영태가 소개됐다.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김영태(1930년생)는 1951년 낙동강 전투 후퇴 중 지리산에 입산해 이현상 부대인 남부군에서 활동했다.이현상 사령관 호위대에 속해 있던 그는 1952년 2월 탄환이 왼쪽 눈을 관통하며 체포됐다.

징역 20년의 선고를 받아 1971년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하지만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으로 1975년 청주보안감호소에 수감됐다.1989년 사회안전법 폐지로 출감해 청주양로원에 머물렀다.그는 노년에 청주에서 목수 일을 하고 광주 '빛고을 탕제원'에서 일하기도 했다.참석자 중 김영태와 함세환의 얼굴과는 다르게 박순천과 정순택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북송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청주상고를 졸업한 비전향장기수 정순택(1926년생)은 상공부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1949년에 월북했다.1958년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간첩 혐의로 체포돼 31년 5개월을 복역했다.그는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북한에 아내와 아들 4명을 두고 있음에도 송환대상에서 제외된 것.

이런 분위기 탓인지 정진동은 "이제 화해라는 대명제를 놓고 남과 북이 손을 잡고 있다.소가 북한으로 가고,북쪽에 경제특구 지역이 생겨나는가 하면~ 이 마당에 이제 더이상 국가보안법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참석자들은 한결같이 김영태와 함세환의 북송을 축하했다.

"전쟁 OUT"

▲ 평화통일한마당 충북 평화통일한마당.연설자가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2002년 6월 13일 조양중학교 2학년 신효순,심미선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두 여학생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갓길을 걷다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대대 전투력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이던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숨졌다.

사고 직후 유족들은 차량 운전병과 관제병,미2사단장 등 미군 책임자 6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의정부지청에 고소했다.또한 미군의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다.하지만 미군 측은 신변 위협을 이유로 검찰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았다.재판권 포기에도 응하지 않았다.재판 결과 가해자들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전국의 시민들이 들끓었다.그해 11월 26일 드디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하기 시작했다.청주에서는 7월 31일 시내 성안길 철당간에서 미선이 효순이 49제 추모행사를 했다.정진동은 여중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추모사를 했다.정진동은 그해 11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심미선·신효순 살인 미군 무죄 반대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진동이 여중생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한 것은 한국전쟁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미군에 의해 충북 영동 노근리와 단양 곡계굴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그것이다.정진동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3년 만인 2003년 1월 14일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곡계굴을 찾았다.

1951년 1월 19일 난리를 피해 곡계굴에 피난해 있던 인근 주민과 강원도에서 내려온 피난민 약 300명이 미군 폭격과 기총소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 현장이었다.고인들을 추모하는 합동위령제에는 생존자와 유족들이 곳곳에서 울음을 터뜨렸다.정진동은 50여 년 전의 비극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느꼈다.전쟁의 참상과 미군의 만행이 제대로 반성되지 못함으로 인해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파병·국가보안법

1970~80년대 노동·농민운동과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에 주력했던 정진동은 1990년대 들어 새로운 영역의 운동을 전개했다.1993년 창립된 '역실협(역사정의실천협의회)'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고,1990년대 후반부터 작고하기까지는 통일운동에 온몸을 바쳤다.그가 운동 영역을 전환한 것은 시대변화에 따른 당연한 것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진영은 자신의 조직을 만들었다.충북에서는 AMK,코리안마이트,한주전자,충북전자,뉴맥스,한국야금 등의 민주노조운동이 태동됐다.청주노동문제상담소(1989.1.28)와 청주노동자의 집(1991.12.2)이 노동조합 지원단체로 출범했다.전국농민회 총연맹 충북도연맹도 1990년 6월 10일 출범했다.

정진동이 1999년에 출범한 민권공대위와 2003년에 출범한 통일연대(서울은 2001.3.15.)에 적극 참여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에 기인한다.이러한 상황에서 2003년 11월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미국의 파병 요구에 보수-진보 진영의 찬·반 양론이 격렬했지만,결국 참여정부는 '국익'이라는 명분하에 파병을 결정했다.

▲ 이라크 파병 도보 행진단 이라크 파병 도보행진단.정가운데 흰옷 입은 이가 강희남 목사,강희남 목사 좌측이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전국의 시민단체와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인 이라크 파병 반대를 외쳤다.정부의 최종 입장이 확정되기 전 2003년 10월 10일 목포역 광장에서 파병 반대 천리 길 도보 행진 발대식이 열렸다.고령의 성직자와 지식인들이 목숨을 건 천리(400km) 길 걷기를 결정한 것이다.그만큼 그들에게는 전쟁 반대·이라크 파병 반대가 중요했다.

충북에서는 정진동 목사와 김창규 목사가 참여했다.강희남 목사와 전 한겨레신문 기자 박해전 등이 함께했다.목포에서 출발한 도보행진단은 무안과 광주,전주,도박 애논산,온라인카지노 먹튀계룡,대전을 거쳐 10월 23일 청주에 도착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 비상충북 도민행동'은 청주 성안길 철당간에서 '민중 도보 순례단 환영식 및 충북 결의대회'를 했다.전교조 충북지부장 성방환은 고령의 도보행진단을 환영하고 파병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이후 청주에서 조치원을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는데,총 20일간의 도보행진 이었다.70세의 나이에 천리 길 행진에 참여한 정진동에게는 사실상 목숨을 건 일이었다.

결국 통일운동은 전쟁 반대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또한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 체제 수립을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맞물린 일이다.

충북 도내 3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보안법 폐지 충북대책위원회'는 2004년 12월 1일 상당공원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천막농성은 사회당과 장민경,이은규 등이 주동이 됐다.당시 대중 가수 '거미' '거북이' 등이 초대됐다.문화 프로그램 중심의 천막농성은 시민들에게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공감대를 확산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 이라크 파병 도보 순례단 청주 도착 이라크 파병 도보 순례단 청주 도착.가운데가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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