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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눈 춥지 않게 묵은 잎으로 감싸듯…암그루 모성애일까
겨울잠을 자던 벌레나 개구리가 깨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경칩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대구 도심과 가까운 범어공원의 순환산책로를 걷다 보면 갈잎나무(낙엽수)는 대체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놓고 있지만 지난해 가을 누렇게 말라버린 잎을 겨우내 그대로 매단 나무 군락이 있어 눈길을 끈다.
상록수를 제외하고 보통 낙엽수의 잎사귀는 초겨울 바람에 맥도 못추고 떨어져 버리지만 이 나무는 유독 말라빠진 묵은 잎을 반듯하게 달고 있다.이름은 감태나무,4월 초 새순이 돋을 즈음에야 비로소 바랜 잎사귀를 떨군다.
◆ "3월에도 묵은 잎 그대로 있네"
감태나무는 왜 묵은 잎을 온전하게 매달고 묵묵히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걸까?이런 특이한 현상을 전문 용어로 '낙엽 발생 지연[leaf marcescence]현상'이라고 한다.감태나무뿐만 아니라 단풍나무류,참나무류,슬롯 없음 보증금 무료 스핀느릅나무류 등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바싹하게 말라버린 잎의 일부만 가지에 남아 있어 보기에 처연하다.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북쭉의 외래종 가로수인 대왕참나무의 경우 버석한 갈색 잎을 겨울에도 고집스럽게 달고 있다가 매서운 바람에 낙엽을 떨구다가 봄이면 대부분 앙상한 가지만 남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연출된다.
나뭇잎은 일반적으로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온도가 낮아지면 옥신이라는 호르몬이 감소함에 따라 잎자루의 끝부분에 떨켜(탈리층)가 형성되면서 가지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낙엽 발생 지연'이 발생하는 나무에서는 이러한 떨켜가 형성되지 않으면서 잎이 가지에 오래 붙어 남아 있게 된다.지구 북반구의 온대 활엽수림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그 까닭이 궁금해진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은 '낙엽 발생 지연'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국제 공동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고 지난해 밝힌 적이 있다.이 현상의 원인과 관련된 가장 유력한 가설의 하나는 나무가 겨울 동안 죽은 잎을 간직함으로써 곤충이나 새로부터 겨울눈을 보호하고 이른 봄에 땅에 떨어짐으로써 생육이 왕성한 시기에 적절한 미네랄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일종의 '적응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현상이 특정한 나무들에서만 관찰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생태적 기능은 없는 '진화적 산물'이라는 가설이다.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감태나무의 모성애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겨울눈을 추위로부터 조금이라도 보호하려고 겨우내 묵은 잎으로 감싸듯 달려 있다는 얘기다.
일부 일본인들은 감태나무 표본을 만들어 입시철에 상술로 판매한다.수험생들의 염원은 오로지 합격이다.감태나무 단풍잎이 겨울의 강한 바람에도 줄기에 매달려 버티듯이 시험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그럴듯한 설명을 곁들여 '귀가 얇은' 수험생들을 유혹한다.
◆감태나무의 다양한 이름
감태나무는 대구 경북의 산기슭에서 만날 수 있다.키는 5~6m쯤 자라는 작은 나무다.잎이나 어린 가지를 꺾으면 향기가 난다고 하지만 냄새에 둔감해서 아직 제대로 맡아보지 못했다.
감태나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식물학자 정태현이 지은 『조선삼림식물도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1,2년생 가지에서 나는 냄새가 해조류인 감태와 비슷해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된다.주로 바닷가 근처에서 자라는 독특한 향이 있는 식물로 향과 관련된 중국명은 山胡椒(산호초)다.
제주도 등 일부 지역에서 '백동백나무'라고 부르는데 이는 동백나무처럼 열매에 오일 성분이 많아 기름을 짜서 쓸 수도 있고,잎 뒷면과 나무껍질에 흰색(회갈색)이 돌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북한에서도 '흰동백나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봄날 먹을거리가 모자라면 감태나무 새잎을 따다가 말린 다음 가루를 만들어 밥이나 떡에 섞어서 양을 늘려 먹는다고 한다.
◆주황색의 단풍 아름다워
암·수 딴 나무인 감태나무는 3월 말이나 4월 초순에 주황색을 띤 새잎이 돋고 며칠이 지나면 연한 황록색의 자잘한 꽃이 핀다.잎은 다소 빳빳하고 도톰하며 광택이 있고 가지에 어긋나게 달린다.여름에 녹색의 자잘한 열매가 자라서 가을이면 팥알보다 조금 작은 씨앗이 새까맣게 익는다.반지르르한 윤기가 있어 검은 구슬을 떠올릴 만큼 열매는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가을에 잎사귀는 노란빛의 주황색으로 물든다.추위가 닥치고 찬바람이 불면 잎은 점점 습기를 잃어 바짝 마른다.한겨울엔 바랜 듯한 갈색인지 젊은이들이 머리카락 염색으로 애용하는 애쉬핑크인지 모를 모호한 색상으로 봄까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감태나무가 잘 자라는 곳은 영호남과 제주도 바닷가에 인접한 숲이지만 대구 도심공원에서도 자주 보인다.최근 순환산책로가 완공된 수성구 범어공원이나,아시안게임 e스포츠무학산 중턱 순환산책로,동구 감태봉 기슭의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숲 아래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맹아력이 뛰어나 한 뿌리에서 여러 개의 줄기가 자라는 관목으로 수형도 참하다.
몸피가 크지 않은 감태나무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름대로 어여쁜 멋을 선물하기에 정원수로도 괜찮다.
◆국내에 암그루만 존재
감태나무는 암·수 딴 그루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과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그런데 놀랍게도 한반도와 일본에는 암그루만 분포한다.흔히 아는 상식으로 암그루와 수그루가 함께 살아야 열매를 맺고 번식할 텐데 수그루 없이도 암꽃의 씨방이 성숙해 종자를 맺는다.꽃가루받이를 통해 암·수의 유전자가 만나서 섞이는 게 아니라 암그루의 복제로 이뤄진다.신비로운 이런 현상은 식물의 세계에서는 종종 일어나며 '아포믹시스(apomixis·무수정결실)'라고 하는 무성생식의 일종이다.
달걀의 무정란은 병아리 부화가 절대로 안 돼 종족을 이을 수 없지만 감태나무는 암그루 혼자 씨앗을 맺어 자손을 퍼뜨릴 수 있다.전 세계 속씨식물 중 400여 종이 감태나무와 같은 방식으로 후손을 퍼뜨린다고 한다.
식물학자들은 감태나무가 보기 드문 방법으로 번식하는 이유는 생육 환경이 좋지 못했던 먼 옛날에 멸종을 막기 위해 진화했기 때문이다.감태나무는 꽃가루받이를 못 하도록 아예 밀봉해도 열매를 맺었다고 하니 경이롭다.
또 일본에서는 몇 년 전 한 연구팀이 열도에 분포된 감태나무의 DNA를 분석한 결과 유전적으로 거의 균일한 복제 개체로 밝혀졌다.
보통 생물들은 부계와 모계의 유전자를 받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생존한다.하지만 수그루를 만날 수 없게 되자 일부 식물들이 종족 보존을 위해 어미 홀로 후대를 생산하는 새로운 돌파구가 아포믹시스다.한반도와 일본에서 살아가는 감태나무는 자연스럽게 '암그루 세상'을 이루고 있다.
◆감태나무 지팡이
민간에는 벼락 맞은 감태나무를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나무라는 뜻의 연수목(延壽木)으로 부르며 지팡이로 만들어 사용한다.벼락 맞은 나무는 귀신을 쫓고 액운을 방지한다는 속설 때문이다.나뭇가지는 여물어서 쉽게 부러지거나 갈라지지 않아서 콩이나 깨를 터는 농기구인 도리깻열을 만드는 데 쓰인다.
불가에서는 큰스님들의 법구(法具)인 주장자[지팡이]를 감태나무로 만들기도 한다.설법할 때 주장자(拄杖子)를 바닥에 세 번 치고 들어 사부대중들에게 보인다.이는 선가(禪家)에서 설법할 때 단지 주장자를 들어서 대중(大衆)에게 보임으로써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진리를 다 드러내 보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상 생략)
당시 선생의 손때 묻은 물건으로 말하면
[若道當年手裏玩 약도당년수리완]
어찌 투호며 벼루가 없으랴마는
[豈無投壺與書硯 기무투호여서연]
분명히 주장자를 사람에게 보여 주니
[分明拄杖擧似人 분명주장거사인]
이러쿵저러쿵 한바탕 말 필요가 없지
[不用郞當說普遍 불용랑당설보편]
종래에는 몇 겹의 공안이 가로막혔었는데
[從來公案隔幾重 종래공안격기중]
돌이켜서 찾으니 바로 내 마음속에 있어라
[反求只在吾心胸 반구지재오심흉]
정조며 표리가 일시에 서로 통하기를 기다려
[直待精粗表裏一時通 직대정조표리일시통]
위아래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
[上下可以緯群龍 상하가이위군용]
< 『갈암집』 권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대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짚었던 청려장을 노래한 「홍백원(洪百源)의 도산청려장가(陶山靑藜杖歌)에 차운하다」라는 시다.'주장자 설법'을 빌려서 퇴계가 짚던 청려장을,진리를 전수하는 물건에 비유했다.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갖는데 좋은 추억과 함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오늘의 만남이 겨우내 감태나무 가지 매달린 잎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대구의 나무로 읽는 역사와 생태 인문학』 저자·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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