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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장례 이야기①] 안내면 월외리 이기석·유봉이씨 부부에게 듣는 마을 장례 이야기삶과 죽음은 연결돼 있지만,우리는 삶을 이야기할 때 그 끝의 죽음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합니다.이를 배경으로 장례,지금은 거의 사라진 '마을 장례'의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이웃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는지,그 속에 어떤 정서와 가치가 있었는지 나눕니다.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2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기자말>
죽음과 쉬이 연결되는 감정은 분명 슬픔일 테다.그러나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가 병원이 아니라 그가 살던 집이었던,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마을의 일이었던 시절을 경험한 이들은 '죽음'의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더 이상 마을 장례가 자연스럽지 않아진 오늘날,마치 잔치 같던 마을 장례를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갔다.충북 옥천군 안내면 월외리의 이기석(73),유봉이(70)씨 부부의 추억을 전한다.
어머니 곁에서 보던 풍경
이틀 전,마을 어른이 돌아가신 터라 지난 며칠간 온 마을이 들썩였다.오늘은 장지에 관을 옮기는 날로 아버지는 상여 행렬에 참여하느라 집을 비우셨고,어머니는 짬을 내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그 곁에서 창 너머를 바라보니 상여를 든 긴 행렬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상여 모서리마다 수직으로 나뭇가지가 고정돼 있고,각 꼭대기에는 가장자리를 푸른 빛으로 물들인 흰 천이 묶였다.어머니께서 "천이 위로 펄럭이면 배곯지 않은 이의 상여"라 일러주셨는데,상여의 커다란 천이 상여꾼들의 발걸음에 맞춰 나부낀다.그 움직임에 집중해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다 보니 귀를 때리던 요령잡이의 목청이 점차 멀어진다.아마 내일부턴 시끌벅적하던 마을이 다시 조용해질 테다.- 유봉이씨가 들려준 옛이야기를 재구성했다(기자 주)
유봉이씨는 어린 시절 어머니 곁에 앉아 길게 이어지는 상여 행렬을 종종 구경하곤 했다.마을에서 죽음을 맞이하고,장례를 위해 마을 주민이 손을 걷어붙이는 모습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풍경 중 하나였다.
"우리 어릴 땐 마을에 사람이 많았으니까,마을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도 잦았지.누가 돌아가시면 온 동네 사람이 다 달라붙어서 일을 했어.여자들은 음식 준비를 돕고,남자들은 그 밥상을 손님들께 날랐어.애들 하는 일?애들은 말도 못 하게 시끄럽게 구는 게 일이었지(웃음)."
잔치를 닮은 장례
"요즘엔 육개장이 대부분이고 충청도에선 올갱이국을 대접하기도 하지만,나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는 돼지국밥을 많이 끓였어.고기가 귀했잖아.장례는 곧 고깃국을 먹는 날이기도 했어.콩나물무침도 인기 있는 메뉴였지."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부족함 없이 나눠 먹을 음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을엔 잔치 분위기가 돌았다.거기다 이웃 동네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와 흥을 돋우니 마을 장례는 애통함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는 자리였다.
날이 좋은 때는 초상집 마당에 멍석을 깔아 손님을 맞이하고,궂은 날엔 이웃집에서 방을 내어줬다는데,천명훈 도박그 때문에 "마을에 있는 상이란 상은 모조리" 초상집으로 몰려들곤 했다.
"초상나면 다 그 집 가서 일하고 먹고 하니까 집에 상이 필요 없지.그때 집에서 쓰는 상이 다 엇비슷하게 생겼었거든.헷갈리지 말라고 상다리에 남편 이름을 써놓곤 했어.글 모르는 사람은 끈을 묶어두기도 하고."
손님맞이를 위한 음식 마련,부고장을 쓰고 염을 하는 등 모든 일을 상제가 직접 준비하던 때.가족을 잃은 슬픔과 몰아치는 일 앞에서 혼란한 이들을 도운 건 '이웃'들이었다.마을 어른 중 한 분을 호상(상례와 관련된 일을 주관해 처리하는 사람)으로 모셔 해당 장례의 감독 역할을 하게 했고,여성들은 음식 준비를,남성들은 부고장을 돌리고 상여를 장지로 옮기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내가 초등학교 1~2학년쯤에 할아버지가 병상에 계셨는데,큰어머니가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이웃집에 보리를 나눠주면서 술을 담가 달라고 하고,또 다른 몇 집엔 콩나물 키워달라고 부탁하셨어.그리고 정말 얼마 안 있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장례 치르려면 술이랑 음식이 많이 필요한데 도와준 이웃 덕에 할아버지 장례를 잘 치렀어."
가난한 집에서 장례를 치를 적에는 이웃들이 쌀이나 음식을 모아 비용을 마련하곤 했다.부잣집은 넉넉하게,살림이 어려운 집은 되는 만큼씩 거둔 것을 모아보면 장례 한 번 치르면 한 달 치 식량이 나오기도 했다.이에 마을에서 "그 집은 장례 치르고 살림살이 나아졌네" 하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고.이렇듯 "내 일,네 일 나누지 않고 일손을 모으는 게 당연"했으니 마을에서 치르는 장례는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함께 하는 잔치였을 테다.
옥천 월외리의 마지막 요령잡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마을 장례가 사라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생을 마감하는 곳이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졌고,이웃들이 힘을 모아 치르던 장례는 전문가의 영역이 됐으니 말이다.그래도 장례식을 마치고 장지로 고인을 옮기는 일이 필요했기에 약식으로나마 마을 장례가 치러지곤 했다.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시 월외리에도 이를 위한 인력이 필요했는데,마을 젊은이들이 조직한 당군계가 그 역할을 했다.당군계에 필요한 인원은 12명.이 중 8명은 상여를 메고,3명은 각각 깃발과 영정사진 그리고 혼백을 드는 역할을 맡는다.여기에 이들을 이끄는 요령잡이까지.
대부분의 인원은 마을 젊은이들로 채워졌지만,요령잡이 자리가 비어 있었다.요령잡이를 하던 고 최용훈씨는 상여 행렬을 이끌기엔 연로했고,요령잡이를 하겠다는 이도 없었기 때문.공석이던 요령잡이 자리가 채워진 건 1999년부터 이장을 맡던 이기석씨가 최용훈씨를 찾아가면서부터다.
"마을에 요량재비(요령잡이) 할 사람이 없으니 다른 부락 사람을 사오는 겨.거기에 마을 돈이 계속 들어가니까 이럴 바엔 내가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그래서 요량재비를 하던 어른을 찾아가 노래를 배웠어."
최용훈씨가 불러주는 노랫가락을 들으며 공책에 가사를 빼곡하게 정리,저녁마다 들여다며 노래를 익혔다.숱한 연습 덕에 요령잡이 일을 그만둔 지 10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의 입에서 능청스러운 가락이 흘러나온다.
"요량재비하는 사람은 좀 뻔뻔시러워야 해.상여꾼들 말고도 온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데,거기서 큰소리를 내는 게 민망스럽기도 해.그런 시선을 개의치 않고 우렁차게 소리하는 게 요량재비의 일이지.12명 되는 상여 행렬을 목소리로 통솔해야 하니까.그래서 술이 들어가야 소리가 더 잘 나와(웃음)."
울음과 웃음이 뒤엉킨 상여 행렬
영구차가 마을에 관을 싣고 오면 관을 내려 상여에 멘다.그렇게 향하는 첫 목적지는 고향집.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서야 그 걸음이 장지로 옮겨간다.상여꾼 11명과 그 뒤를 따르는 상주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이끄는 이가 바로 요령잡이다.
요령잡이가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 밖에 또 있는가~' 하고 노래를 부르면 뒤따르는 상여꾼들이 추임새를 넣는다."곡조를 부를 때는 힘이 있으면서도 가락을 길게 빼면서 청승을 떨어야 한다"는데,이처럼 "앞장서서 청승을 떠는 이가 있어야 상주들도 맘 놓고 슬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요령잡이가 늘 슬픔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길을 가던 중 건너기 어려운 도랑을 마주할 때면 '아버지가 막내아들 나와 보란다'하며 상제를 불러내 놀기도 하는 것.부름을 받은 이는 상여 앞으로 나와 큰절하고 상여꾼들에게 막걸리를 따라 주거나 노잣돈을 챙겨주곤 했다.
장지 위치에 따라 상여 길이 1시간 넘어가는 경우도 생기는데,이때 요령잡이의 재치가 빛을 발하곤 한다.
"노래를 다 불렀는데도 도착하지 않는 때가 있어.그러면 이전에 부른 가사를 다시 부르던지 어떻게든 노래를 이어내야 하지.가는 길에 가사를 까먹을 때도 있는데,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불러야 해.'가자 가자,얼른 가자~'하는 식의 가사를 부르면서 원래 가사가 생각날 때까지 시간을 끌곤 했어(웃음)."
구슬프고 흥겨운 노래를 따라 장지에 도착하면 요령잡이는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새로운 노래를 시작한다.
"하관하기 전에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월외리 뒷산 무슨 골에 묻히니께,가만히 보니까 좌우 용백호가 뚜렷하여 옥황상제가 내려다보는 좋은 자리,카지노 특별출연이만큼 자손이 부귀영화하게 복을 넣어달라' 하는 신고의 노래를 하는 거야.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 신고하고 관을 묻어야 화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하관 후 부르는 마지막 노래는 지신밟기다."천지조정은 곤용산이요.수지조정은 황해수라.대지조정은 토지지신이며.명산명기를 찾아서왔네" 하는 소리에 맞춰 상여꾼들이 빙글빙글 돌며 장지 위를 밟는다.여기까지 마치면 상여꾼들의 일은 끝이 난다.
장례식장이 대중화된 이후에도 월외리에서는 상여 행렬이 종종 이어졌다.그러나 코로나19의 유행 이후로 매장이 아닌 화장으로,선호하는 장례 방식이 변하면서 더 이상 요령잡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온 마을이 함께 울어가며,또 놀아가며 서로를 위로하던 마음도 요령잡이의 목소리와 함께 사라졌을까.서로의 곁을 지키는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월간옥이네 통권 92호(2025년 2월호)
글 사진 이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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