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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마장 가는 길 - 영화 경마장 가는 길

NO.1: 영화 경마장 가는 길

[144 신화편.일리아스 3부작 中(트로이 전쟁⑥)]


편집자 주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흐름상 약간의 변형·생략,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은 콘텐츠 제작과 유통에 큰 힘이 됩니다.

※이번 글은 8000자 가량입니다.구독,저장,댓글을 활용한 스크랩 등으로 두고두고 읽으셔도 괜찮습니다.귀한 시간을 내주신 독자분들께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그러면,바로 시작합니다.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다음 화,즉 <최종장>은 이틀 뒤인 3월 3일에 게시할 예정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파트로클로스,1780,캔버스에 유채,122x170cm,토마-앙리 미술관

◆지난 이야기

그리스 연합군과 맞선 트로이군은 제우스의 도움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다.게다가 연합군 최고의 명장인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갈등을 빚은 후‘파업’을 선언한 상태였다.트로이군 총사령관인 헥토르는 그런 아킬레우스만 없다면,어쩌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이유인지,결정적 순간에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한 이가 전장에 모습을 보인다.당황한 트로이군은 밀려나기 시작한다.


트로이가 낳은 기적


화살에 맞아 상처 입은 파트로클로스를 돌보는 아킬레스,꽃병 윗부분,기원전 500년경,베를린 구 박물관

멍청한 자식.

트로이의 왕세자 헥토르는 동생 파리스가 친 사고 앞에서 탄식했다.대체 얼마나 무모하면 남의 나라 왕비를 납치하는가.그 짓거리가 무슨 후폭풍을 몰고 올지 정말 몰랐는가.일을 저질러놓고는 한다는 말이 “아프로디테 여신이 부추겼다”는 변명뿐이었다.

헥토르는 파리스를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아무리 못나고 멍청해도 동생이었다.피로 맺어진 존재였다.

역시나 헥토르의 예상처럼 일이 터졌다.

난데없이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는 트로이에 전쟁을 선포했다. 심지어 주변 국가를 끌어모아 그리스 연합군을 꾸렸다.1000척가량 전함,10만~12만명에 이르는 대군이 이곳을 향해 몰려왔다.언젠가부터 이번 건은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 사이 명운을 건 전쟁으로 비화해있었다.

헥토르는 트로이군 총사령관으로 방어 채비를 갖췄다.

헥토르는 트로이의 기적이었다. 그는 트로이 최고 전사이자,신들이 앞다퉈 애정을 표할 만큼 고귀한 기운의 소유자였다.트로이와 일대 나라에도 비범한 인물이 있기야 했지만,헥토르는 이들 사이에서도 차원이 다른 영웅이었다.그래서일까.헥토르는 본인만 건재할 수 있다면 이번 격돌도 해볼 만하다고 봤다.오직 한 명,아킬레우스.동시대 최강 사내로 통하는 그가 상대편에 합류하지만 않는다면.

볼프강 페터젠,영화 트로이(Troy·2004) 스틸컷

그러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헥토르는 그리스 연합군의 교활한 오디세우스 등이 기어코 아킬레우스를 포섭했다는 말을 들었다.정말로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었다.그래도,그런 아킬레우스가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반목하고 있다는 말이 닿았을 땐 진심으로 기뻤다.아킬레우스가 이번 전쟁이 참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데 대해선 벅찬 감정까지 올라왔다.그렇게 계속 내홍에 빠지고,제발 전장에는 나오지 말라…. 헥토르는 매일 밤 손을 모았다.

헥토르의 트로이군은 제우스의 도움,아킬레우스의 부재를 등에 업고 지금껏 그리스 연합군을 몰아세웠다.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자기들이 타고 온 전함까지 뒷걸음질쳤다.트로이군은 전함을 모두 불태우고,도망치기만 하는 병사들 또한 물귀신으로 만들 작정이었다.그렇게 10년가량 이어지던 전쟁도 끝낼 마음이었다.

설마,정말 아킬레우스가?


헨리 푸젤리,파트로클로스의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는 아킬레우스,1803,캔버스에 유채,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아킬레우스다!”

누군가의 이 함성은,그 결정적인 순간 들려온 것이었다.헥토르는 맹렬하게 달려오는 전차를 볼 수 있었다.육중한 말 두 마리가 굉음과 함께 질주하고 있었다.그 위에는 번쩍이는 장비로 무장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눈앞 트로이군 병사를 빗자루질하듯 쓸어 넘겼다.

그의 등장만으로 전장 분위기가 뒤집혔다.

그는 존재 자체로 트로이군에게 공포를 심었다.무작정 도망치게 했다.헥토르는 갑작스럽게 펼쳐진 장면 앞에서 당황했다.왜 갑자기 아킬레우스가 전장에 나섰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싸움을 이어가는 건 무모한 행위다.헥토르는 이런 판단에서 후퇴를 결정했다.

그런데,잠깐….아킬레우스가 원래 저렇게 싸웠는가.

헥토르는 말을 돌렸지만,왠지 모를 찝찝함은 떨치지 못했다.멀리서 보인 남자는 분명 늠름했다.검술과 격투술도 수준급이었다.등장과 동시에 트로이군을 몰살할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그러나…. 오직 이 사내의 무용(武勇)만을 놓고 볼 때,그 정도는 디오메데스대 아이아스 등 연합군의 2인자급도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특히나 개운치 않은 건 아킬레우스랍시고 등장한 사내가 틈틈이 보인,무언가 어색한 모습이었다.

일단 그의 몸과 비교해선 투구와 갑옷이 미세하게 커 보였다.그가 말을 채찍질할 때도 순간의 망설임이 있었다.마치 자기 말이 아닌 것처럼.그렇다면 설마?헥토르는 트로이성으로 물러서던 군을 멈춰세웠다.

진짜 정체가 드러나다


샤를 앙투안 쿠아펠,아킬레우스의 분노,1737,캔버스에 유채,147x195cm,에르미타주 미술관

헥토르 생각이 맞았다.사실,급박한 순간에 등장해 전장 흐름을 바꾼 아킬레우스는 ‘가짜 아킬레우스’였다.

진짜 정체는 아킬레우스의 둘도 없는 친구,파트로클로스였다.

내막은 이랬다.

헥토르의 트로이군이 그리스 연합군을 한창 때려잡을 무렵,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가 머무는 방을 다급하게 찾았다.

“내 절친이여.이제라도 화를 풀고 참전하지 않는다면,나중에는 함께 돌아갈 연합군이 한 명도 남지 않을 거야.” 파트로클로스는 눈물을 흘리며 아킬레우스에게 호소했다.“그럼에도 응어리가 여전하다면….” 파트로클로스는 여전히 꽁한 표정의 아킬레우스에게 말을 덧붙였다.“자네 장비와 전차,병사라도 내게 빌려줘.이대로면 모두 떼죽음을 당할 거야.”

아킬레우스는 눈을 감았다.

건방진 아가멤논이 재차 이런 부탁을 했다면 곧장 거절했겠지만….내 혈육 같은 파트로클로스가 요청하지 않는가. 아킬레우스가 입을 열었다.“그래.신들이 선물로 준 갑옷과 투구,전차까지 다 챙겨가게.” 파트로클로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내가 잠시 그대 병사들과 함께 나설게.자네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만큼,자네인 양 모습을 보이는 일만으로 흐름을 바꿀 수 있겠지.그렇게 급한 불부터 끄고 오리다.”

“친구.”

아킬레우스가 돌아서는 파트로클로스를 불러세웠다.“후퇴하는 이들은 추격하지마.또,당장 신의 기운을 받고 있는 헥토르와는 절대 맞붙어선 안 돼.” 이 말을 당부하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멀어지는 파트로클로스를 보며 기도했다.

내가 부모만큼,형제처럼 사랑하는 그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하지만 그 소망은 곧 산산조각 나고 만다.

어기기 말았어야 한 경고


앙리 레비,사르페돈,1874,캔버스에 유채,235x306cm,오르세 미술관

아킬레우스처럼 꾸민 파트로클로스는 퇴각하는 트로이군 진영을 헤집었다.

그는 트로이군 소속인 리키아의 왕 사르페돈에게도 창을 때려박았다. 사르페돈은 무려 제우스의 아들이었다.나아가 트로이군 진영의 왕족과 장수,책사도 셀 수 없이 학살했다.그러다보니 파트로클로스는 어느새 트로이성 앞까지 닿아 있었다.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경고를 어기고 만 것이다. 기세가 오른 파트로클로스는 그런 당부는 잊은 지 오래였다.그는 트로이성을 기어 올라갔다.맨 위에 닿을 때쯤이면 계속 미끄러졌는데,이는 트로이 편의 아폴론이 그를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이제라도 물러서야 했다.

그래봤자 한낱 인간이기에,신의 노골적인 개입 앞에서는 몸을 사리는 게 현명했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그러지 않았다.성벽 오르기를 관둔 그는 재차 창을 들었다.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군 장수 에우포르보스와 대치했다. 에우포르보스 또한 그리스군을 스무명 넘게 죽인 이력이 있었다.그만큼 나름의 실력자였다.파트로클로스가 그에게 달려들기 위해 창을 바로 잡는 순간,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자크 루이 다비드,파트로클로스,1780,캔버스에 유채,122x170cm,토마-앙리 미술관

nvme pcie 슬롯206); font-weight: bold;">…무슨 일이지?

파트로클로스가 주변을 둘러봤다.그때 웬 거대한 손바닥이 머리를 후려쳤다.투구가 땅바닥을 뒹굴었다.이 또한 아폴론의 짓이었다.파트로클로스의 장비를 강제로 벗겨 죽음으로 몰고자 하는 모략이었다.파트로클로스가 투구를 다시 썼다.이번에는 손에서 창과 방패가 떨어졌다.허리를 굽히는 사이 갑옷을 지탱하는 허리끈도 느슨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파트로클로스는 무장해제가 된 상태였다.

에우포르보스가 그런 파트로클로스를 향해 창을 던졌다.파트로클로스는 상처를 입었지만,전투 불능이 될 만큼의 치명상을 안지는 않았다.에우포르보스는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헥토르,파트로클로스를 죽이다


줄리아노 로마노,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지키는 아이아스,1539년경,반토바 공작 궁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은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놓고도 각축을 벌였다.연합군의 메넬라오스와 대 아이아스가 기를 쓰고 나선 끝에 겨우 지킬 수 있었다.하지만,가짜 아킬레우스의 정체와 그의 최후를 안 트로이군은 곧 대대적인 역습에 나설 게 뻔했다.

그렇다면 이제 트로이에서 나설 사람은 또 헥토르뿐이었다.

전차를 탄 헥토르가 아킬레우스,그러니까 아킬레우스인 척하는 파트로클로스 앞에 섰다.파트로클로스도 이제야 맞수를 만났다는 듯 멈춰섰다.‘…헥토르와의 정면 대결은 피해야 해’ 아킬레우스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지만,등을 보이기에는 이미 늦었다.

파트로클로스는 바위를 뽑아 헥토르에게 던졌다.

전차가 산산이 부서졌다.헥토르가 아낀 마부 케브리오네도 즉사해버렸다.헥토르는 그대로 땅 위에 섰다.창을 뽑아 들고,천천히 걷다가 서서히 빠르게 내달렸다.파트로클로스는 위대한 전사였지만,그도 헥토르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심지어 파트로클로스는 아폴론의 방해로 제대로 태세도 갖추지 못한 상태 아닌가.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의 배에 창을 길게 꽂아넣었다.“…너는 제우스와 아폴론,두 신의 도움으로 승리를 얻었구나.이미 죽음의 검은 운명이 네 앞에 닥쳤으니,곧 내 친구 아킬레우스가 너를 덮어줄 것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이 말을 끝으로 명을 다했다.아킬레우스의 당부를 따르지 않은 결과는 이처럼 허무하고,참담했다.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가 차고 온 아킬레우스의 모든 장비를 끌어안았다.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창과 방패를 들자 그것들은 그의 몸에 딱 맞게 모양을 바꿨다. 이는 제우스가 불어넣은 마법이었다.

라파엘 테게오,아킬레우스에게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둘러싼 전투를 알려주는 안틸로코스,1831,캔버스에 유채

메넬라오스는 아킬레우스의 또 다른 친구인 안틸로코스를 불렀다.

그는 안틸로코스에게 당장 연합군 진지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어떻게든 아킬레우스 앞에 서고,그에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군을 향해 격분할 수 있도록.

안틸로코스는 이 말을 따랐다.

아킬레우스는 다급히 달려온 안틸로코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죽었소.”

“누구에게?”

“헥토르가….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장비도 모두….” 안틸로코스는 숨이 차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킬레우스는 말없이 의자를 끌어당겼다.

털썩 주저앉았다.고개를 푹 숙이고,몸을 떨었다.이내 크게 흐느꼈다.이는 화산이 폭발할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그사이 안틸로코스는 아킬레우스의 두 팔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슬픔에 절여진 그가 그대로 극단적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 탓이었다.

앙투안 비에르츠,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놓고 싸우는 그리스인과 트로이인,19세기경,703x395cm,리에주 미술관

“헥토르!”

아킬레우스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내가 너를 죽여 복수하리라.” 이 말은 하늘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연합군 편의 아테나가 그런 아킬레우스에게 빛을 비췄다. 음성 또한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었다.전장의 모든 이가 눈이 빨개진 아킬레우스를 볼 수 있었다.살육과 복수를 맹세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트로이군은 아킬레우스의 진노 앞에서 전의를 잃었다.

헥토르의 빛나는 통솔력마저 지금만큼은 힘을 쓰지 못했다.연합군은 그사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진지로 가져갔다.겁에 질린 트로이군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그렇게 또 하루치의 전투가 끝을 맺었다.

어머니 테티스의 눈물


개빈 해밀턴,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킬레우스,1760~1763,캔버스에 유채,227x391cm,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어머니.”

아킬레우스가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그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바로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저는 이제 전쟁에서 죽어도 좋습니다.앞으로는 저를 막지 마세요.” 울먹이는 아킬레우스 앞에서 테티스 또한 흐느꼈다.

‘…네 아이는 전쟁에서 영광을 얻으면 죽는다.다만,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있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신탁을 다시 떠올렸다.기어코 내 아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그래도 내일 아침까지만 참거라.내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찾아 새로운 장비를 주문해주겠다.”

파트로클로스가 주검이 돼 돌아왔을 때,아킬레우스는 또 한 번 짐승처럼 길게 울었다.

“왜 내 말을 따르지 않았는가.” 아킬레우스는 그의 가슴 위 손을 얹고 울먹였다.“내가 헥토르의 머리와 장비를 갖고 오겠네.그때까지는 그대의 장례를 치르지 않겠어.” 아킬레우스는 재차 맹세했다.

아킬레우스의 참전 선언


제임스 손힐,불카노스(헤파이스토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받는 테티스,1710,패널에 유채,개인 소장

다음 날 아침.

아킬레우스는 새벽녘부터 작전 회의장을 찾았다.총사령관 아가멤논부터 오디세우스,디오메데스 등 모든 장수를 불러모았다.

“내가 헥토르를 죽이겠소.” 아킬레우스는 본론부터 말했다.

“아가멤논이여.우리는 한 여자로 인해 반목했소.결국 덕을 본 건 헥토르와 트로이군밖에 없으니,지난 일을 씻어버리기로 하지요.” “그래….사실 나 또한 그때는 정상이 아니었소.신들이 내 마음에 광증(狂症)을 불어넣었던 게 틀림없소.” 이렇듯,이번에는 아킬레우스가 먼저 화해의 뜻을 표했다.아가멤논은 여기에 대고 끝까지 구차한 면을 보였지만,둘 사이 더는 갈등의 기운이 없었다.

벤자민 웨스트,아킬레우스에게 갑옷을 가져다주는 테티스(1),1806,캔버스에 유채

벤자민 웨스트,아킬레우스에게 갑옷을 가져다주는 테티스(2),1806,캔버스에 유채

때마침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아들을 위한 장비를 잔뜩 챙겨왔다.

과연 헤파이스토스의 작품다웠다.떨어지는 잎마저 알아서 잘릴만큼 예리한 검,한없이 가볍지만 결코 쪼개지지 않을 갑옷과 투구,하늘과 바다 등 정교한 장식이 박힌 다섯 겹의 쇠가죽 방패,신고 달리다 보면 어느덧 하늘을 날게 될 듯한 가죽신….“이토록 훌륭한 장비를 받은 사람은 지금껏 없었단다.” 테티스의 말이었다.

여태껏 대놓고 트로이군 편을 들어줬던 제우스는 이제 그럴 뜻을 접었다.

엄밀히 따지면 제우스는 이들이 더 예뻐서 도와주지 않았다.그저 테티스의 요청대로 그리스 연합군이 아킬레우스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도록 판을 짰을 뿐이었다.제우스는 다시 중립에 섰다.

아킬레우스의 거듭된 진노


앙리 레뇨,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무기를 아킬레우스에게 가져가는 테티스,1866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앞세운 그리스 연합군은 곧 트로이군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트로이군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넓은 평원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이는 헥토르의 결정이었다.기세에 밀려 방어만 한다면,결국은 다른 국가처럼 말라죽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양군은 난전을 벌였다.그 틈으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두 사내가 서로를 향해 기어코 다가갔다.

“내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여.오거라.”

토토로 디즈니214);">“그대가 나보다 강하다는 건 알지만,내 창이 네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드디어 전투태세를 갖췄다.아킬레우스는 숨 돌릴 틈도 없이 헥토르를 향해 창을 던졌다.하지만 이는 헥토르 발 아래 맥없이 떨어져버렸다.아킬레우스는 검을 빼들고 헥토르에게 달려들었다.한 번,두 번,또 한 번….순식간에 세 차례나 날을 휘둘렀다.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살점이 떨어지는 소리를 기다렸다.그런데,직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헥토르가 없었다.완전히 사라졌다. 아폴론의 소행이었다.아폴론이 헥토르를 잡아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것이었다.

앙리 프레드릭 쇼팽,아킬레우스를 쫓는 강의 신 스카만드로스,1831,캔버스에 유채,에콜 드 보자르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물줄기,스카만드로스강이 시체로 가득차도록 살육을 이어갔다.그 모습은 도살자와 같았다.어찌나 심했는지,강의 신이 직접 고개를 내밀곤 “네 녀석이 쌓아놓은 시신 탓에 숨을 쉴 수 없으니,이곳 말고 평야에서 싸우라”고 항의할 지경이었다.아킬레우스는 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살을 지속했다.결국 강의 신에게 미움을 사 난데없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아킬레우스는 헤라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물을 말려야 했을 만큼 위험에 놓였었다.이는 아무리 인류 최강인들,결국 인간이라면 그 어떤 신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에피소드일까.

신들의 농락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완전히 눈이 돌아가버렸다.

그리스 연합군은 또 한 번 트로이성 앞에 바짝 붙었다.아킬레우스가 날뛰어준 덕이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이름을 외치며 대열 맨 앞에 섰다.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 왕인 프리아모스는 성문을 열었다. 물러서는 트로이군만 받아들인 뒤 다시 빗장을 걸어 잠글 생각이었다.다만,아킬레우스의 전차가 빨라도 너무 빠른 게 문제였다.결국에는 아폴론이 트로이군을 위해 또 꾀를 부렸다.아킬레우스를 저 멀리 따돌렸다.아킬레우스는 뒤늦게 신에게 놀아났다는 걸 알았지만,이미 때는 늦었다.

아킬레우스는 허탈함을 안고 다시 트로이의 성문 앞에 닿았다.

역시나 문은 닫혀있었다.그런데….그 닫힌 문 앞에서 전사가 홀로 서있었다. 그는 그토록 찾고,잡고,죽이고 싶던 상대.헥토르였다.

헥토르는 왜 병사들과 함께 성안으로 피신하지 않았는가.왜 아킬레우스를 기다리고 있는가.

“헥토르여.
내가 사랑하는 아들 헥토르여.
아킬레우스만큼은 맞서지 말거라.
나는 이미 많은 아들을 잃었다.
너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
너는 우리 성안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생명이란 귀한 것이다.
나는 사리 분별을 못할 만큼 늙지 않았다.
불행하게 돼도 좋을 만큼 늙지도 않았다.”
트로이 왕이자 헥토르의 아버지,프리아모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성벽 위에서 이렇게 우짖고 있었다.

두 영웅,드디어 마주하다…승자는?


볼프강 페터젠,영화 트로이(Troy·2004) 스틸컷.아킬레우스 역의 브래드 피트

볼프강 페터젠,영화 트로이(Troy·2004) 스틸컷.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

결국 내가 죽이든,내가 죽어야 한다.

헥토르의 생각이었다.아킬레우스에게 팔다리가 잘린 장수,전차에 짓밟혀 뼈가 부러진 병사,피투성이가 돼 어머니를 찾는 이들… 곳곳 들려오는 신음,통곡,절규.헥토르는 이 광기의 순간을 끝내고 싶었다.조바심,아울러 이보다 더 크고 짙은 자책감이 휘몰아쳤다.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래서 닫힌 성문을 다시 열고,만류하는 병사들을 뿌리친 채 홀로 광야에 선 것이었다.

아킬레우스는 그런 헥토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그의 창끝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참고자료>

일리아스,호메로스,숲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강대진,그린비

일리아스,김헌,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기자의 말풍선


개미처럼 열심히 읽고,쓰고 있습니다.다음 편은 이틀 뒤인 3월 3일에 올리겠습니다.곧,또 인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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