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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그날까지 36화] (2부) 민간인 학살 유족 김맹규의 선행

▲ 사진 1 2025.1.12 진주시 문산 진성고개 아랫법륜골 학살지를 찾아서 참배하는 김맹규 선생 모습 ⓒ 김영희
김맹규 선생의 백부(김형강 당시 28세)와 외할아버지(강용희 당시 39세)는 학살되었다.한 가정에 한 명만 학살 피해자가 되어도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는데,양부모가 유족이니 김 선생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50여 년이 넘도록 부모의 상흔을 보며 살아온 김 선생은 우연히 1988년 '보도연맹' 관련 기사를 접하게 됐다.그와 만나 <한겨레 신문>에 보도연맹 관련 기사를 투고한 사연과 그로 인해 월간 <말>지 김태광 기자와 만난 일,그리고 202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2기)가 재출범했을 당시 백부와 외조부,정영식(주1) 세 사람의 진실 규명 신청 과정과 규명받은 후 손해배상소송 관련 사연을 살펴보았다.

진성고개(진주시 문산)의 생생한 기억을 찾아서

김 선생은 진주 유족회 행사에서 언젠가 진주 진성고개 애티골 학살지에 찾아 가보고 싶다고 했다.마침 지난 1월 12일 필자와 함께 애티골을 찾았다.애티골은 2009년 12월 경남대 박물관 고 이상길 교수 주도로 학살지 윗법륜골,아랫법륜골 두 지점을 발굴하여 유해 111구를 수습했으며,현재 유골은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되어 있다.

김맹규 선생의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에 따르면,김 선생의 외조부는 애티골에서 학살되었다.외조부는 1950년 6월 1일(음력)날 회의 소집이 있다는 전갈을 받고 개양지서로 갔다.일주일 후 개양지서에서 외조부가 탄 트럭이 나오는 것을 외삼촌이 목격했고,그 트럭은 애티골 방향으로 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외할머니와 외삼촌은 그 소문을 듣고 시신 찾으러 애티골로 향했다.

당시 어머니는 12살로 어려서 못 갔다고 한다.그날 날씨는 찜통 더위에 비까지 내려서 널브러진 시신들은 흙과 나뭇가지로 대충 덮어있었다.이를 들쳐 보니 부패로 인해 악취와 파리 떼가 가득했던 시신들은 서로 얽히고설키어 도저히 구분할 수 없어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애티골 학살지의 유일한 생존자(이아무개씨)의 증언에 의하면,그들은 '끌려간 사람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총으로 쏘았다.그리고 넘어진 사람들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리를 발로 차고 꿈틀거리면 확인 사살했다고 한다.(주2) 그러나 애티골 학살지에서 당시 처참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2009년 발굴 당시 돌부리와 모래주머니 등 흔적만 남아있었다.감나무 과수원은 한겨울이라 앙상한 가지와 풀숲에 묻혀서 잠들고 있었다.아랫법륜골 발굴지는 사유지라,땅 주인이 표지판 세우는 것을 꺼려해 학살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 사진 2 (좌) 2009년도 아랫법륜골 발굴지 현장 모습 (우) 현재 발굴지 모습 ⓒ 김영희
▲ 사진 3 김맹규 선생은 발굴지에서 참배하고 과수원 주인(김진은)과 대화 나누는 모습 ⓒ 김영희
필자: "어머니(강봉선)와 아버지(김형필,1935년생)는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습니까?"

김 선생: "아버지는(당시 15살) 진양군 사봉면 마성리 1127번지 남마성마을에서 거주하셨어요.백부가 학살된 지 1년 후 할아버지(당시 64세)는 남은 자녀들을 데리고 정촌면 관봉리(봉전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겼어요.봉전마을은 외가집 동네였기에 부모님은 서로 중매로 결혼하셨습니다."

필자: "백부가 학살 당하신 후 큰집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김 선생: "큰어머니는 큰아버지한테 보도연맹을 소집한다는 소식을 전했다는 이유로 시댁 식구들한테 평생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았다고 해요.특히 아버지도 평생 형수를 원망하는 것을 들었어요.아버지는 큰조카(김재구)의 학비와 생활비도 보태주기도 하였어요."

필자: "선생님은 언제부터 '국민보도연맹'을 아셨습니까?"

김 선생: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보도연맹이란 단어와 민간인학살에 대해 듣고 살았어요.고등학교 때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학살된 인원이 30만 명 정도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이어 대학교 때는 역사의식이 있어서 1977년 대학교 1학년 때 '유신반대시위'에 참여하여 퇴학도 당하고 1979년도는 시위 주동자로 구속되었고,198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였어요.이어 1983년부터 3년간 한국 현대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어요."

필자: "부모님께서 보도연맹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셨나요?"

김 선생: "저는 50년 동안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억울한 사연을 수백 번,수천 번 반복적으로 들어왔어요.아버지는 우리 가족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꼭 기억해야 한다며 백부의 학살 사건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설명하셨어요.제가 경청하지 않으면 무서울 정도로 화를 내셨고,가만히 잘 듣고 있으면 아주 만족해 하는 모습이었어요.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외할아버지 학살에 대한 상처로 이승만을 비난하고 정영식(학살 생존자)의 증언 등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셨고요."

필자: "어머니 증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습니까?"

김 선생: "당시 어머니는 12살이라 상황을 거의 기억하고 계셨어요."

"봉전마을에서 당시 '봉화 청년회'가 있었제!그 청년회는 활동이 활발했어!좌익 관련 노래도 부르면서 낮에는 또 피신하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와서 밥 먹고 그랬어.경찰들이 청년들 잡으러 왔다가 청년들이 없으면 청년 가족들을 끌고 가서 폭행한 것도 봤어.한 청년이 잡혀서 총을 쏘니까 나락 짚단에 숨는 것도 봤어.동네가 무법천지였제." (어머니 강봉선씨 증언)

필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학살당하신 후 어떻게 살았습니까?"

김 선생: "어머니는 오빠 강신태(당시 16세) 여동생 강갑선(당시 10살)이 있는 삼남매의 둘째셨어요.그 당시 12살 5학년이었기에 정영식이 화령골(진주시 명석면)에서 생존해 돌아와서 말해준,개양지서에서 트럭에 실려 학살지로 끌려간 상황과 살아 돌아온 이야기 등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어요.또한 어머니는 아버지가 지서에 다녀올 거라고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대요.그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고 하셨어요.외조부 학살 후 외가집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고,어머니의 오빠 강신태도 문산중학교 1학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농사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지금까지도 공부를 못한 게 한이 맺혀 술로 마음을 달랬다고 하시더라고요."

강봉선 어머니의 한 많은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경인년 칠월 진주에서는

봄이 가면 여름 오고
우리들 가슴에 아픔으로 경인년 칠원은 왔는데
유난히 푸르던 산태골
양심에 못질을 하던 화령골의 그 여름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였던 진성고개 콩밭골
배고파 우는 자식 끌어안고 절규하는 젊은 아내
낯선 사람 손에 끌려 행선지 조차 모르고
떠나가는 이 땅 고아들이여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가슴까지 자물쇠로 채운 칠십 년 세월

세상이 망해도 영원히 씻지 못할 이 상처
고통과 비극의 세월,가슴을 틀어 놓고
해원할 그날은 언제 오려나
- 2010년 5월 15일 진주에서,작가 전미경(대전유족회장)

▲ 사진 4 진화위에 신청된 정촌면 관봉리 봉전마을 학살당한자 명단(주3) ⓒ 김맹규
김 선생: "위 사진 자료는 봉전마을에서 개양지서로 소집된 14명 명단입니다.강용희(외조부)의 4촌,6촌,8촌 당숙 등 7명의 친인척들도 한꺼번에 학살되어 강씨 집안 전체가 초상집이었어요.그리고 친가 김형강(백부)씨도 학살되었고,하하 포커 불법여동생 시조부(정재길 1904년생)는 대전형무소에서 집단학살 당하셨죠.소송과 관련 자료 전부 제가 찾았고 소송비용도 부담했지만 결국 1심,2심 패소했어요."

필자: "정말 참담하군요.선생님 1988년도 <한겨레신문>에 '국민보도연맹사건 투고 기사'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김 선생: "1988년 12월 1일자 <한겨레신문> '국민보도연맹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요.그 순간 떨리는 마음으로 용기 내어 그동안 침묵해 왔던 울분을 토해낸 거지요.1988.12.8.국민기자석에 아래와 같은 투고 기사를 실었어요."

▲ 사진 5 1988.12.8일자 <한겨레신문> "보도연맹사건 진상 밝혀라 양민학살 언제까지 감출 것인가!" 김맹규 선생의 기사 ⓒ 김맹규
필자: "당시 보도연맹 관련 기사를 쓰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용기가 대단하십니다.위 기사 투고 후 별일 없었습니까?"

김 선생: "왜 별일 없었겠습니까!기사 투고를 실명으로 올려서 '전교조 표적'이 되어 가택 수속 나오고 '국가 보안법'으로 1989년 8월 14일 구속되었어요.그해 12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지만,유죄로 교직에서 해임되었어요.그래서 전교조 상근자로 10년간 근무한 후 복직되었습니다.

제 기사투고를 보고 월간 <말>지 김태광 기자가 근무지 '목동중학교 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학교 전화로 연락이 왔어요.저는 1989년 1월 9일 김 기자와 동행하여 부산 자택에서 강봉선 어머니를 인터뷰한 후 봉전마을에 찾아가서 당시 진주보도연맹원 학살지(화령골)에서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생존한 정영식씨를 만나 인터뷰하여 1989년 <말>지 2월호에 실었어요."

▲ 사진 6 1989년 2월<말지>김태광 기자와 김맹규 선생이 진주시 정촌면 봉전마을 정영식댁에서 인터뷰한 날 좌측부터,김맹규 선생,정영식(생존자),손녀 (우) 맨 뒷줄 정영식 처(박재순) ⓒ 김영희
필자: "선생님 큰 고초를 당하셨군요.선생님도,선생님의 부모님도 그 험난한 역경과 고통을 어찌 견뎌내셨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선생님께서는 한국전쟁 진주 민간인 학살지(진주 명석면 화령골)에서 생존자 정영식을 소개해,생존자의 증언이 처음으로 기사화되었고 이어서 진실규명과 배상금까지 받게 해주신 분입니다.생존자의 증언이 기사화 되고 배상금 재판까지 승소한 것은 아마 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필자가 들은 바로는 대부분의 생존자는 숨어 살기 급급했고,생존이 알려지면 다시 잡혀가서 목숨을 면치 못한 사례가 많았다고 하던데,정영식 생존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것이야말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또 하나의 주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뜻 있고 의미 있는 일에 혼신을 다해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필자: "큰아버지·외조부·정영식의 진실규명은 언제 받으셨나요?"

김 선생: "2020년 12월 10일 진화위 2기가 재출범하자마자 세 분을 진실규명 신청했고,2023년 8월에 정영식과 외조부는 규명을 받았습니다.백부는 2024년 10월에 규명 받았어요.백부의 규명이 늦은 탓으로 개별 소송은 근 4년 가까이 소요되어 상심이 컸지만 우여곡절 끝에 2025년 1월에 승소했습니다.정영식과 백부는 법적으로 규정된 배상금을 받았으나,원더 슬롯 777어머니 삼형제 모두 원고로 신청해야 하는데 변호사가 민간인 학살 관련 소송 경험 부족으로 오빠가 누락되어 다시 항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번 기사를 준비하면서 김 선생이 이중고 삼중고를 겪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현재 진화위 조사에 의하면 발굴 사업은 약 20% 정도 완료되었다.발굴된 유해는 약 4천 구다.혼령들이 잠들 수 있는 안식처로 대전 골령골에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었지만 현 정부는 예산 약 500억 원이 편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당성 조사를 2년 이상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진화위 2기가 출범되었지만,4년 동안 고작 진실 규명을 받은 유족은 전국적으로 대략 300여 명에 불과하다.유족들은 정부가 규정한 최저 배상금(집단학살 기준)조차도 판결을 받지 못해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이 문제들을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보도연맹명부'를 공개하고 그 명부대로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진화위가 존속할 필요도 없다.도대체 정부는 왜 유족들을 이중고를 겪게 하는지 유감스러울 뿐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함께,이름 모를 산천에 나뒹굴고 있는 학살 피해자의 백골들을 모두 찾아 발굴하고 그 유해를 유전자 검사하여 유족의 품에 안겨주고 배상금을 지급하길 촉구한다.필자는 유족이 아니다.하여 유족들의 심정과 고통을 일면식도 헤아릴 수 없는 처지다.김 선생의 고난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 과연 선생님께 후원금을 받는 것이 도리가 아닌 듯하고 미안함이 앞을 가린다.

참고로 김 선생은 유족으로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관련 역사 자료를 기록하고 찾아서 보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블로그 '숨어산다'를 운영하며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기고 있다.전국 민간인학살(보도연맹원) 관련 자료 및 진화위 규명 진행 과정,손배상 재판 과정과 판결문 등 모든 자료를 망라해서 보관하고 관리하고 있으니 이에 관련 자료가 궁금한 분들은 '숨어산다'를 꼭 참조하시기를 바란다.

그동안 필자의 기사를 구독하고 격려해 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개인적인 사정으로 당분간 연재 기사를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고맙습니다.

▲ 사진 7 필자 명함 ⓒ 김영희
[각주]
주1) 진주지역 집단학살은 1950년 7월 21일부터 26일까지 자행되었다.정영식은 1923년생으로 진주시 명석면 화령골 학살지로 끌려갔다.화령골 학살지에서 총상을 세 곳에 맞았지만,기적적으로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우여곡절 끝에 (현재 거리 기준) 학살지에서 봉전마을까지 대략 35km 정도를 걸어 15일 만에 무사히 집에 도착한 유일한 생존자이며,봉전마을 14명의 학살을 재차 증언하였다.그 후 마을에서 도로 살아왔다는 뜻으로 '도살이 양반'으로 불렸다.필자가 봉전마을에 찾아갔을 때 지금도 동네에서는 도살이 양반으로 통하고 있었다.

주2)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4민사부 판결문,사건:2021가합32234 손해배상(국),원고:강봉선,이유: 기초 사실 참조.

주3) 1기 진화위(2009년)에서 진실규명된 박도성의 유족 박철남은 관봉리 봉전마을에서 자신의 아버지 외 13명이 진주경찰서 지서(개양지서)의 소집에 응하였다가 학살되었다고 진술했다.(국가기록원 진술조서 자료 및 진주국민 보도연맹사건 1기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421쪽 참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기 창원유족회 유해 발굴 조사단장·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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