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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오버 더 모빌리티](8)
현대차 포니,'마이카 시대' 열어
한국 경제와 중산층 성장 대표해
포니 개발 기간 불과 2년 3개월
韓,토토 사이트 해킹 썰 베스트 온라인 카지노슬롯검증사이트고유 승용차 보유 9번째 국가
북미 수출도 성공적…수출 주도 경제 초석 닦아
편집자주[현대차,오버 더 모빌리티]는 현대자동차그룹이 글로벌 3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혁신 비결을 정리한 콘텐츠입니다.예로부터 자동차 산업을 주도한 국가가 글로벌 경제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제조업의 꽃인 자동차 산업은 기술 발전과 수출,고용의 측면에서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과거 현대차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였다면 이제는 산업을 이끄는 선두 주자(first mover)로 부상했습니다.글로벌 취재 현장에서 느낀 현대차의 과거와 현재,미래의 주소를 그대로 전달해드립니다.연재는 40회 이후 서적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충구 현대자동차 전 사장은 1974년에는 대리였다.국산 고유 승용차 모델‘포니(PONY)’를 개발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탈리아 소도시 토리노에 도착했다.당시는 정부가 외화유출 방지와 국가 경제 보호를 이유로 일반인의 해외 출국을 금하던 시절이다.이탈리아의 선진 자동차 기술을 배우겠다는 점을 강조하며 출국 허가도 어렵사리 받아냈다.김포공항에서 밀라노를 거쳐 토리노에 도착한‘현대차 포니 프로젝트’담당자 일행 5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청계천 헌책방 잡지에서나 봤던 유려한 쿠페와 스포츠카가 시내 거리에 가득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활기찼고 경제는 풍요로웠다.늘 검은색 또는 하얀색 옷만 입던 한국 사람과는 달리 이탈리아인의 패션은 총천연색 그 자체였다.반대로 토리노 시내에서 한국인 남자 5명이 걸어가면 구경거리가 되기 일쑤였다.사람들은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고 물어왔다‘꼬레아노(한국인)’라고 하면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요?"라고 되묻곤했다.
포니 1 설계도.현대차 홈페이지이 전 사장은 이곳에서 처음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를 만났다.당시 36세였던 그는 폭스바겐의 파사트와 골프,알파로메오의 줄리아 등을 디자인한 전도 유망한 자동차 디자이너였다.서글서글한 눈매의 이탈리아 청년은 자동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열정도 대단했다.이 전 사장은 주지아로 디자이너의 카로체리아(자동차 공방)‘이탈 디자인(Ital design)’에서 자동차 설계와 제작,디자인 등 개발 과정 전반을 배우게 된다.그리고 이들의 작업 내용을 빠짐없이 수기로 옮겨 적었다.대부분의 장인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기에,의사소통이 어려운 부분은 눈치로 해결했다.
이 전 사장은 "자동차 설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물어볼게 생기는데,아는 게 아예 없으니 그냥 있는 그대로 옮겨 적었다"며 "세세한 용품의 브랜드는 물론이고 설계실,마스터 모델 제작실 진행 상황까지 참고할만한 건 모두 기록했다"고 회고했다.이때 기록했던 노트는 훗날‘이 대리 노트’로 불리며 후배들의 개발 지침서가 됐다.
현대차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모델에 탑승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사진 오른쪽)과 조르제토 주지아로 포니 디자이너.현대차 제공2년 3개월만에 만든 韓 최초 고유 승용차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회장이 이 전 사장 일행에게 허락한 시간은 1년 남짓이었다.그는 1974년 2월 이탈리아에 파견됐으며 그해 10월말에 토리노에서 열리는 국제모터쇼에‘포니 해치백’과‘포니 쿠페’2개의 프로토타입을 전시해야만했다.주지아로는 패스트백(fast back) 스타일을 제안했다.패스트백은 자동차 지붕에서 뒤쪽 끝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자동차 디자인 스타일이다.유럽에선 최신 트렌드였지만 한국인들에겐‘꽁지 빠진 닭’모양 같다는 평이 돌아왔다.하지만 포니 개발 당시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었던 정 선대회장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이 전 사장에 따르면 정 선대회장은 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신차 디자인 품평회는 반드시 챙겼다고 한다.
포니 1.현대차 홈페이지포니는 이탈리아의 디자인,일본의 섀시 및 엔진 기술,미국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합쳐져 만든 차였다.여기에 한국인 엔지니어들의 땀과 눈물이 더해졌다.현대차는 고유 승용차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도와줄 해외 업체를 물색했다.1973년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과 차체 설계 용역 계약을 맺었고,일본 미쓰비시와 가솔린 엔진과 변속기,후차축 등 플랫폼 제조 기술 협약을 체결했다.이듬해인 1974년에는 영국 최대 자동차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의 부사장을 지낸 조지 턴불(George Henry Turnbull)을 기술 고문으로 영입했다.다만 자문단은 컨베이어벨트는 유럽의 어느 업체가 좋은지,금형 업체는 일본의 어떤 회사가 경쟁력있는지 등 단편적인 정보는 제공했지만 최종 결정은 고스란히 현대차 엔지니어의 몫이었다.업체 조사와 비교,선정 등의 구체적인 일들은 현대차가 직접 나서야만했다.
2년 3개월의 개발 기간을 거쳐 1975년 12월 포니의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했다.포니의 첫 번째 시승회 장소는 남산이었다.정세영 당시 사장은‘포니가 남산을 오르지 못하면 우리는 망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포니가 남산의 급경사 도로를 가뿐하게 등판하자 정부 관계자와 기자들 사이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결과는 대성공이었다.출시 첫 해 포니는 국내에서 1만대 이상 팔리며 전체 승용차 시장 점유율 43.6%를 차지했다.훗날 주지아로 디자이너는 "현대차는 당시 성공을 의심하던 회의적 시각을 완전히 뒤집었다"며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강한 의지와 희망으로 가득차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정세영 현대차 당시 사장과 조지 턴불 현대차 부사장이 포니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현대차 제공정주영 선대회장의 자동차 사랑
"한 나라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국토에 퍼져있는 도로는 혈관이고,자동차는 혈관을 돌아다니는 피와 같다."
정주영 선대회장이 남긴 이 말은 국가 경제에 대한 그의 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몸속에 원활하게 피가 흐를 때 우리가 건강한 활력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한 국가의 경제도 자동차의 움직임이 곧 경제의 활력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는 논리다.그가 이같은 말을 남겼던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도로 포장율이 10%에도 못 미쳤다.정 선대회장은 전후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단 국가 교통 체계부터 정비해야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현대차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핵심 구간인 서울~수원 구역 공사를 맡았다.정 선대회장은 기업의 이윤을 줄이고서라도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공사 기한은 반드시 맞추라는 지시를 내렸다.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우리나라는‘서울~부산 하루 생활권’이 가능해졌다.물류·수송·유통 경쟁력이 향상되면서 경제 발전과 산업화 속도도 빨라졌다.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회장과 포니.현대차 홈페이지국가의 핏줄을 까는데 일조한 현대그룹이 혈액에 해당하는 자동차 산업으로 눈을 돌린 건 필연적인 선택이었다.정 선대회장의 추진력에 힘입은 현대그룹은 1968년 미국 자동차회사 포드와 자동차 조립생산(CKD)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한국에서 조립 생산된 첫 번째 자동차는 영국에서 팔리는 소형 세단‘코티나’였다.포드 창립 이래 6개월만에 공장을 짓고 착수 3개월만에 부품의 21%를 국산화한 CKD 업체는 전 세계에 현대차가 유일했다.포드도 현대차의 추진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성공적으로 조립생산 능력을 보여준 현대차는 자체적인 제조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했다.1970년대 정부는 최적의 요건을 충족하는 회사 한곳에만 엔진 주물 공장 설립을 허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동아시아로 시장을 넓히고자했던 포드는 현대차에 엔진공장 설립을 넘어 합작사 설립을 제안했다.지리한 협상이 이어졌지만 두 회사의 최종 협상 결과는 결렬이었다.포드는 현대차를 단순한 부품 조달 회사로 여겼으나 현대차의 꿈은 그보다 원대했다.역으로 현대차는 합작사에서 만든 국산차를 포드의 영업망을 활용해 세계 시장으로 수출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결국 정 선대회장은 "국산 고유 승용차 모델을 개발하겠다"며 포드와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 노선을 걷게된다.
4년 후인 1974년 현대차는 포니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1976년 첫 고유 모델인 포니를 세상에 내놨다.이로써 대한민국은 자동차 고유모델을 보유한 9번째 국가가 됐다.한 차종이 고유 모델로 불리기 위해서는 자국 국적의 회사가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설계·생산·조립을 자국에서 해야한다.동시에 자국 브랜드 이름으로 해외 수출이 가능해야한다.
‘마이카 시대’연 포니
포니와 1980년대 중산층 가정.현대차 홈페이지현대차 포니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과 산업화의 상징이다.포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이자 일반 대중들이 살 수 있는 첫 번째 자동차였다.현대차가 설립된 1967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50달러 수준에 불과했다.포니가 출시된 1976년에는 830달러,
경마 실시간 배당판포니 2가 출시된 1982년은 1973달러로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소득이 늘면서 중산층도 늘었고,본격적인‘마이카 시대’가 개막했다.1980년대 중산층 가정의 제 1순위 목표는‘자가용 구매’였으며,
슬롯 커뮤 주소당시 거리를 돌아다니는 가장 흔한 택시는 포니였다.덕분에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포니는 언제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동시대를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포니의 등장만으로도 영화의 시대적인 배경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포니는 비포장도로가 많은 한국 지형에 특화돼 개발됐다.내구성이 좋아 택시로도 인기가 많았다.해외에서 부품을 조달해 조립생산한 경쟁차보다 국산 부품 사용률이 높아 가격 경쟁력까지 갖췄다.무엇보다 대한민국이 만들고 해외로 수출한 첫 번째 자동차라는 타이틀로 애국 마케팅까지 가능했다.그 결과 포니는 출시 첫해 1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데 이어 3년 연속 국내 승용차 시장 50% 이상 점유율을 달성했다.1978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단일 차종 10만대 생산 돌파의 대기록을 세웠다.
현대차의 고유 승용차 모델의 이름을 공모하는 신문 기사.현대차 홈페이지美서 수출 대기록 세운‘포니 엑셀’
포니 수출 10만대 행사 사진.현대차 홈페이지포니의 첫 수출은 물물교환 형태로 이루어졌다.1976년 7월 현대차는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하는 계약에 사인을 했다.포니와 바나나를 맞교환하기로 한 것.에콰도르산 바나나를 실은 냉동선이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 배에 포니 5대를 실어 보냈다.당시 한국엔 바나나가 상당히 귀한 과일이었다.한국 농수산부는 바나나 수입 허가를 쉽사리 내주지 않았지만 국산 자동차 수출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기꺼이 수입을 허락했다.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된 포니의 수출은 1980년대에 이르러 북미에서 꽃을 피웠다.포니의 후속 차종인 포니 엑셀은 1987년 미국에서 연간 수입 소형차 판매 1위를 기록했다.이때 세운‘26만3610대’의 대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경쟁 차종인 도요타의 코롤라,닛산의 센트라,혼다 시빅을 제친 결과다.포니 엑셀은 수출 시장을 겨냥한‘X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자 현대차 수출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테스트하는 가늠좌였다.물론 미국 시장에서 초반의 대성공은 나중에 품질 문제가 불거지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하지만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미주에서 국산차가 일본차를 제쳤다는 소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겐 희망적인 메시지였다.
포니 엑셀.현대차 홈페이지미국에서 성공은 앞선 캐나다에서의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1984년 캐나다에 출시된 포니 2는 출시 첫 해부터 수입차 점유율 10% 기록을 깨며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당시는 제2차 석유파동의 후폭풍으로 모든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어려웠다.현대차도 대규모 인원 감축을 할 정도로 벼랑 끝에 서있었다.그때 외화벌이를 하며 흑자 경영을 가능하게 해준 효자가 바로 캐나다 시장의 포니 2였다.이 차는 가성비가 좋은데다 후륜구동(뒷바퀴 굴림) 모델이라 엔진룸이 훨씬 간단해 정비도 편했다.
오죽하면 현대차의 무관세 수출을 막아야한다며 다른 수입차 딜러들이 캐나다 정부와 언론에 로비를 할 정도였다.당시 우리나라는 후진국으로 분류됐기에 자동차 수출에 관세가 없었다.만약 이들의 논리대로 관세를 물리게 된다면 포니 2의 가장 큰 무기인 가격 경쟁력이 사라지게 된다.이 소식을 들은 정 선대회장은 바로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토론토 외곽에 1000~2000평 규모의 부지를 사서 그곳에 불도저를 왔다갔다하게 하라는 지시였다.캐나다 상공부 장관을 포함한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는 동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토론토에 부품공장을 짓겠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라는 후속 지시도 내려왔다.
40년도 넘은현대차의 오래된 스토리는 2025년 오늘날의 이야기와 분명 겹치는 대목이 있다.최근 미국 트럼프 2기 정부는 한국산 자동차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자국 제조업을 살리겠다는 명분도 있지만,미국 시장에 발을 담근 글로벌 기업에게 투자를 늘리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하다.40년 전 할아버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025년 현재,어떤 해결책을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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