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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아사히글라스의 불법파견을 인정했다.해고 후 3321일 만에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갔다.대구·경북 독립언론 〈뉴스민〉의 박중엽 기자가 투쟁만큼 길었던 취재기를 보내왔다.
“상고를 기각한다.” 대법관의 한마디가 법정에 울렸다.방청객들이 침묵 속에서 환호했다.법정을 나서는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7월11일 대법원은 아사히글라스의 불법파견을 인정하며 해고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과 포옹하고 그들을 축하하는 이들의 행렬이 대법원 청사 앞으로 길게 늘어섰다.돌이켜보면 이들이 9년 넘게 걸어온 투쟁의 여정에는 이날처럼 항상 사람들로 가득했다.
함께 기쁨을 나누는 행렬에 조합원 안진석씨(53)도 서 있다.긴 세월이 안씨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오랜 세월 길 위에서 겪은 일들,인연들도 떠오른다.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크게 잃을 것도 없는 비정규직 인생을 이번 투쟁에 걸었다.투쟁 승리를 이뤄내면 뭔가‘잃을 것’이 생길 것이고,그래서 항상 조심하자고 되뇌이던 그도 이날만은 근심을 털고 해사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보였다.
경북 구미시의 한 공장에서 2015년 5월 시작된 이야기는 어쩌다 9년 동안 이어져,2024년 대법원의 판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구미 공단 최초의 비정규직 노동조합 설립,노조 설립 한 달 만에 178명‘문자 해고,전북 보아텡기업 감시와 노동자 보호에 무관심한 구미시청에서의 농성,전북 보아텡재수사에 미적대는 검찰에 항의하는 전무후무한 검찰청 점거 농성,수사심의위 개최 끝에 기소된 아사히글라스(AGC화인테크노한국) 전 대표에 대한 국내 최초 불법파견죄 징역형 선고‘파견 판사’라는 조롱마저 나온 항소심 재판부의 무죄선고와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까지.
2015년부터 이 싸움을 기록했다.처음에는‘다뤄볼 만한 지역 사안’정도로 여겼다.여기까지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타임라인을 요약하기에도 숨가쁜 세월을 지나며,아사히글라스 투쟁은 한국 노동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소설처럼 비현실적이기까지한 이 이야기를 살펴보려면 구미 공단이라는 배경부터 조합원의 면면,이들이 벌여온 투쟁의 주요 분기점까지 하나씩 짚어봐야 한다.
■‘회색 도시’구미에 흘러온 사람들
안진석씨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일자리를 찾아 구미시로 흘러왔다.구미는 예나 지금이나 대구,경북 북부지역 등 인접 도시에서 취업을 위해 모여드는 도시다.아사히글라스 조합원 22명은 대체로 안진석씨처럼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이들이다.정규직 출신도 있었지만,그 정규직 일자리도 불안정한 직장이기는 매한가지였다.지역 산업 재편의 진폭이 컸기 때문이다.조합원들은 과거 흥했던 섬유산업,가전산업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거쳤다.하지만 이들 산업의 쇠락과 함께 회사가 폐업하거나 합병되면서 퇴직했다.
이 지역의 노동자 투쟁은 1990년대 경기침체와 함께 점차 사그라들었다.노사 협조적인 성향을 띠는 한국노총 조합원이 절대다수인 상황에서 2010년대 들어 산발적으로 쟁의가 벌어지기도 했다.하지만 노동운동의 렌즈로 바라본다면 구미시는 전반적으로 회색빛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 안씨는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 GTS에 취직했다.그 뒤로 유령처럼 살았다.출근과 귀가만 반복하는 일상을 보냈다.휴일만 지켜지면 된다고 생각했다.저임금과 장시간 노동도 감수할 수 있었다.평생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한 탓이다.하지만 3조 3교대로 운영되는 공장은 안씨의 그런 작은 바람도 들어주지 않았다.한 달에 겨우 하루 쉬는 경우도 생겼다.불만을 토로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자 퇴사까지 생각했던 안씨는,물밑에서 진행된 노조 설립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2015년,차헌호 현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을 중심으로 노조 설립이 추진되고 있었다.노조 설립 D-1였던 2015년 5월28일.저녁 근무 교대 시간 직전,노조 설립 준비로 인해‘출입금지’가 걸려 있던 차헌호씨는 회사의 눈을 피해 공장 대기실에 들어와 이렇게 외쳤다.
“제가 여기 다시 들어왔습니다.드디어 노조를 설립합니다.내일부터 노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동지들 가입해주십시오.노조만이 회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누구나 가입할 수 있습니다.”
■ 구미공단 최초의 비정규직 노조
차씨는 곧 퇴장해야 했지만 그의 호소는 하청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2015년 5월29일,구미에서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설립됐다.상급 단체 없는‘아사히사내하청노조’다.당시에는 금속노조 구미지부에 가입하지 않았으나,추후 가입하게 된다.관리자들에게 대꾸도 하지 못했던 하청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 후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처음으로 공장 라인 안에서 노조 조끼를 입고 머리띠도 매어보았다.GTS와 단체교섭도 했다.회사는 노조에‘귀하’라는 말을 쓰며 공문을 보냈다.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인생에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회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부르는 호칭에‘새끼’대신‘귀하’가 붙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노조 설립 한 달 만인 6월30일,아사히글라스는 사업장 내 전기공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전 직원 휴일을 시행한다고 알렸다.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니 안진석씨는 “개꿀”을 외쳤다.그런데 그날 그를 포함해 GTS 소속 노동자들 전원에게 문자로 해고가 통지됐다.GTS 소속 노동자들이 공장을 비운 틈을 타,아사히글라스는 용역 경비를 출입문에 배치하고 조합원 출입을 막았다.공장 안에 있는 소지품을 가지러 갈 수도 없었다.
2015년 무렵 아사히글라스는 산업 재편에 맞춰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었다.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시장 축소에 대비해 구조조정 시 노조 결성 가능성을 고려했고,대비책을 이미 세워둔 상태였다.아사히글라스 내부 문건‘S-Project 추진계획안’에 따르면 당시 아사히글라스는 그룹사의 한국 법인 네 곳 중 PDP 생산업체인‘아사히피디글라스한국’과‘한욱테크노글라스’를 구조조정하고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노조 설립과 분쟁 시 대응,징계 매뉴얼,경찰·노동부 협력 방안 등을 마련했다.
하지만 정작 노조가 설립된 건 아사히글라스(현 AGC화인테크노한국)였다.노조 설립 후,아사히글라스는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노조가 설립된 GTS와 계약을 해지하면서 178명을 일시에 해고했다.형식적이나마 설정해둔 도급 계약기간이 5개월여 남은 상황이었다.그 빈자리에는 다른 관계회사인 아사히피디글라스한국,전북 보아텡한욱테크노글라스 정규직들을 배치했다.당시 아사히글라스에는 GTS 말고도 사내하청 두 곳이 더 있었으나 노조가 결성된 GTS만 콕 찍어 전원 해고했다.투쟁의 시작이었다.시작할 때는 그 누구도 9년이라는 시간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여러 사람과 하나로 연결된 느낌
노조를 처음 접했을 당시 안진석씨는 다소 회의적이었다.가입 당시에는‘비정규직 인생,노조 하다 잘리면 다른 공장 가면 되지’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노조 활동에 대한 거창한 계획도 없었다.다만 다른 직장에 다닌다고 더 나아지리란 기대를 할 수는 없겠다 생각했고,그나마 겪어보지 못한 노조 활동은 호기심에라도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마음이었다.하지만 회사로부터 내동댕이쳐지며 느낀 모멸감에 안진석씨는 본격적으로 노조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조 설립 당시 조합원 교육에 나선 노무사가 “만약 해고되면 판결까지 5년은 걸린다”라고 해 막막하기도 했다.조합원들은 노조 결성 당시 138명이었는데,투쟁하는 9년 동안 22명으로 줄어들었다.초기 적극적으로 조합 활동에 나서고 다른 이들을 규합한 조합원들은 희망퇴직 제안을 대체로 수용했다.공장에서 처음으로 머리띠를 두르고 일해본 경험,쉬는 시간에 모여 투쟁가를 불러본 경험,사용자 측(사측)과 협상 대상으로 나란히 앉아본 경험이 강렬하긴 했지만,많은 이들이 생활의 어려움과 오랜 투쟁에 대한 비관 속에서 떠나갔다.
공장에서 퇴출된 이후 당장 구미시청 앞에 천막을 쳤다.아사히글라스는 구미시청으로부터 여러 특혜를 받은 회사이니 시청이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시민에게 대량해고 사태도 알렸다.당시 남유진 구미시장은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2016년 3월 중앙노동위원회가 계약 해지를 부당노동행위로 판단했지만 구미시는 2016년 4월 농성장 강제 철거에 나섰다.조합원들은 농성장을 둘러싸고 끈으로 몸을 묶었으나 철거 인력 700여 명이 농성장을 무너뜨렸다.농성장은 2016년 노동절인 5월1일 공장 앞에 다시 설치됐다.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에 사측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조합원들은 박정희 생가 앞 박근혜 퇴진 촉구 시위(2016년 11월)에 나섰다.2017년 4월에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오수일 조합원이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27일간 단식 고공 농성을 했다.이 고공 농성은 전국적인 연대투쟁의 출발점이 됐다.현대자동차 비정규직,콜트콜텍,동양시멘트,하이텍알씨디코리아,세종호텔 해고 노동자와 함께 농성하며 목소리를 냈다.
2017년 8월에는 사측의 불법파견을 기소하라고 요구하기 위해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검찰청 앞 천막 농성 당시 대구지검에 대한 국정감사도 열렸는데,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천막 농성장에서 해고 조합원들을 만난 다음 국정감사장에서 노승권 당시 대구지검장에게 아사히글라스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노 지검장은 신속한 수사를 하겠다고 답했으나 그해 12월 검찰은 불법파견 혐의가 없다며 사측을 불기소했다.
불기소 처분 이후 대구 수성구청은 대구지검 앞 천막 농성장을 철거했다.그러나 노조는 2018년 11월 다시 그 자리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12월에는 대구지검 로비에 들어가 연좌 농성을 벌였다.안씨도 그때 검찰청 청사 로비에 앉아 사측의 기소를 촉구했다.구속을 각오했다.연좌 농성이 불법이라도 상관없었다.당일 저녁 모두 경찰에 연행됐지만 안씨는 그때 연행되면서도 고통 속의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여러 사람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2019년 2월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는 아사히글라스의 불법파견 기소를 권고했다.이틀 뒤 검찰은 불법파견 혐의로 아사히글라스와 당시 대표를 기소했다.해고 뒤 4년 만의 일이다.이후 이어진 불법파견 관련 민형사 재판에서는 줄줄이 조합원이 승리했다.2021년 8월,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은 파견법 위반죄로 하라노 다케시 전 아사히글라스 대표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전북 보아텡정재윤 전 GTS 대표에게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단 한 차례,아사히글라스가 기소된 형사사건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적이 있다.항소심 재판부(대구지방법원 제4형사부)는 원심 재판부에서 인정한 다섯 가지 불법파견 요소를 모두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그러나 대법원이 파기환송하면서 이 항소심 판결은 다시 뒤집혔다.
조합원들은 판결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투쟁의 무대를 전국으로 확장해갔다.2018년 3월 일본 도쿄시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본사를 찾아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전국 노동자 투쟁 사업장은 물론이고 백남기 농민 사망 이후 투쟁,태안화력발전 하청 노동자 김용균 투쟁,성주 사드 배치 반대 현장처럼 연대가 필요한 곳에 발벗고 나섰다.
이들의 고민은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 문제에서 한국 사회 비정규직 일반이 겪는 문제로 뻗어나갔다.차헌호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여겼다.이를 위한 연대에 중점을 뒀다”라고 설명했다.이후 이들은‘비정규직 이제 그만’공동 투쟁의 주축이 된다.
■ 아사히 투쟁의 빛나는 순간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조합원들이 전국을 다니며 연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어려울 때 먼저 많은 연대를 받았기 때문이다.노조 설립 초기부터 아사히사내하청 노조는 금속노조 KEC지회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경북 구미의 반도체업체 노조인 KEC지회는 지회 사무실을 아사히사내하청노조에 빌려주었고,농성장 철거 등 위기 상황에서 수시로 뛰쳐나와 함께 싸웠다.
김성훈 KEC지회 사무장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우리도 탄압을 경험했고 많은 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민주노총 가입 노조가 아니라도 민주노조는 지원한다는 민주노총의 문화가 있다.10년의 연대는 대단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고,하다 보면 관계성이란 게 생기기 때문이다.”
성주 사드 반대 운동에 나선 경북 성주군 소성리 주민들도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대법원 승소와 복직을 축하했다.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은 “우리 할매들에게 아사히 청년들은 첫정이다.그 동지들만은 우리가 잊지 못한다.어려울 때 많은 힘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8월1일,해고 3321일 만에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갔다.아사히비정규직지회 투쟁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들의 이야기에서 뜨거운 감정을 느낀다.하지만 아사히 조합원들은‘약함’을 숨기지 않는다.비정규직으로서의 박탈감,부족한 자존감,투쟁 중에도 생계를 위해 다른 생업에 발을 걸쳐야 했던 피로함도 모두 드러내고 공유한다.대신 아사히 비정규직이 드러낸‘약한’자리를 이들과 연대하는 이들이 채워 넣었다.
투쟁의 주요 국면에서‘흔들리는 개인’을 숨기지 않고 공유하면서 이들은 난관을 뛰어넘었다.사측이 차헌호 지회장을 제외한 전원 복직을 제안하며 협상하려 했을 때,누군들 쉽게 뿌리칠 수 있었을까.하지만 이들은 숨기지 않고,개별적으로 결정하지도 않았다.모두 모여 회의한 끝에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아사히 투쟁의 빛나는 순간으로 평가받는 대목이다.
꽤 다양한 노동 사안을 취재해왔다.아사히 투쟁 취재는 비정규직에게 노동이란 어떠한 것인지 가늠해볼 기회이기도 했다‘복직했다’는 말로 투쟁의 기록에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을 것이다.이 취재를 하면서 수첩에 여러 차례‘모멸감‘연대‘비정규직의 주체적 운동’이라는 단어들을 썼다.앞으로 이들이 써 내려갈 또 다른 이야기도 기꺼이 기록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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