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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어머니의 시간을 잠시 멈추는 아들의 꾀【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분 떼고 시간만 계산하는 어머니
어머니에겐 이상한 시계가 있다.이게 딱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고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만 작동하는 굉장히 편파적이고 부정확한 시계다.
우선 어머니에게 분 단위의 시간은 의미가 없다.언제나 정각을 기준으로 시간을 알게 되는데,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한아~ 벌써 7시다.인나라." (6시 30분)
"한아~ 12시 다됐다.언능 자라." (11시20분)
어머니의 시계에는 분침과 초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그 덕분에 시간을 계산할 때도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데,많은 경우 지나치게 오차가 커 당황할 때가 많다.
"내비로 찍어 보니 1시간 10분 걸리네요."
"2시간?그라모 지금 나가야 되것네."
"… 네?1시간 밖에 안 걸…"
"아~ 2시간 맞아!지금 가~"
30분도 20분도 10분도 한 시간으로 퉁 처지는 계산법에 혼란스럽다.그래서 어머니가 알려주는 시간은 대체로 믿지 않는 편이지만,가끔씩 뜻하지 않게 속아서 30분의 여유 시간이 생기기도 한다.그럴 때면 어머니는 흡족하고 나는 왠지 억울하다.
이 시계가 배꼽 언저리로 내려가면 그 파급 효과를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밥 먹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뭐 먹을 건지 정해야 할 때다.
"뭐 좀 무야지~"
아직 배부르다는 내 대답에 먹은 지 한참 됐는데 무슨 소리냐며 어머니는 이것저것 먹을 것을 식탁에 올려놓는다.밥 먹은 지 한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나의 항변은 으레 그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시계에 묵살되고 만다.
"한 시간?벌써 두 시간이 다 돼가고만."
저기,어머니?이제 막 5분이 더 지났을 뿐인데요?제 커피는 아직도 온기를 잃지 않았답니다.어머니?아무리 간곡히 얘기해도 '밥 먹은 지 두 시간이 지난' 어머니의 손은 분주하기만 하다.
냉장고에 라면 보관하는 어머니
어머니에게는 이상한 달력도 있다.이것 역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만의 부정확하고 편파적인 달력인데,블랙 잭 더블 다운보통 음식의 유통기한을 최소 두 달을 당겨버리는 데 사용된다.
"벌써 유통기한이 다 되가네.쩝."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요?"
"아이라,인자 일주일 남은 기라."
아무리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어머니는 신선함이 떨어진다거나 군내가 난다며 유통 기한이 두 달이 남은 라면을 언제 먹어야 할 지 고심이다.뭐,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블랙 잭 더블 다운어머니가 들고 있는 라면이 냉장고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할 수밖에 없다.모르긴 몰라도 유통 기한 두 달 후까지도 괜찮을 듯한데,매번 보면서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다.
라면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유통기한이 붙어 있는 것들은 제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조기에 소진된다.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운 어머니는 철저하게 제조일자를 확인하고 물건을 사들여 기한 안에 처리한다.매 순간 매의 눈으로 식료품을 훑으면,왠지 내 눈에는 그것들이 움찔하는 것만 같아 묘한 웃음이 날 때도 있다.
그런 달력을 보고 계셔서인지 어머니는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뉘앙스의 멘트를 종종 흘린다.
"너그 누나가 입으라고 사줬는데,내가 앞으로 입으면 몇 번을 입것노?"
"대용량이 더 싼데,블랙 잭 더블 다운남으면 누가 쓰것노.그래가 작은 거 샀지."
이제 갓 70세가 되어서는 그런 말하면 어른들께 혼난다고 말씀드리지만,블랙 잭 더블 다운그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쏟아내곤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만다.자꾸만 모든 것의 기한을 앞으로 당겨 오는 어머니의 달력이 너무 앞서 간다.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볼 수 없는 당신의 달력에 무슨 표시라도 있는 건지 자꾸만 앞당겨 생각하는 어머니다.
아무래도 이런 진지한 모습이 탐탁지 않은 나는 어머니의 이상한 시계를 빌려 와 되지도 않을 애드립을 던진다.
"밥 먹은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뿟네."
"진지해지지 말고 진지나 지어 먹지예!"
미숙한 애드립의 결말은 과식이지만,블랙 잭 더블 다운복부의 고통이 선명해지는 동안만큼은 어머니의 근심이 흐릿해지는 듯해 마음만은 편해진다.
어머니의 시간이 이해되는 나이
시간이 쏜살같다는 말을 체감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어머니의 시계와 달력이 그전처럼 이상하지만은 않다.마치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떤 심오한 원리가 어느새 조금은 이해된다고 해야 할까.자식을 둔 부모가 되어 보니 내 안의 시계와 달력도 조금씩 오차가 생기고 있다.조금은 빠르고 조금은 앞서 간다.
어머니의 시간은 그저 가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가족을 생각함에 있어 어머니의 시간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빠르고 부족하기 만해 자꾸만 어머니를 초조하게 만든다.
몇 장 남지 않았다는 달력의 날짜를 당기는 것처럼 어머니의 모든 시간은 그렇게 앞서 간다.그런 어머니의 시간을 붙잡기 위해 나는 오늘도 손이 많이 가는 아들을 자처한다.
"어무이,뭐 먹을 거 없으예?"
"뭐 더 주꼬?그라고 본께 밥 문지 한참 됐네."
조금 전 먹은 밥이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지만,블랙 잭 더블 다운어머니의 대답에 묻어나는 가벼운 흥이 더 깊은 속을 편안하게 만든다.
"어무이,포크는 안 줍니꺼?"
"고마 처묵지.내가 잘못 키아쓰."
과일을 집은 포크를 내 손에 쥐어주며 투덜대는 어머니.그럼에도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음에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바삐 흘러가는 시간을 오늘도 잠시 멈춰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