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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驛)과 원(院) 옛터에서 서울의 과거를 찾다
전국 지명 중에는 역원(驛院)의 명칭을 사용한 사례가 적지 않다.역원은 국립여관으로 공무상의 여행자에게 말과 숙식 등을 공급하는 역과 숙박 등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원을 통칭하는 용어다.현대화와 도시발달 과정에서 역원은 모두 사라졌지만 현재의 지명을 통해 옛 역원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울 노원구의 지명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함경도로 올라가는 경흥대로(慶興大路·도봉로) 상에 설치됐던 노원역(蘆原驛)에서 유래했다.노원구는 서울 동북 방면의 시계를 이루는 구역이지만 조선시대 노원역은 그보다 훨씬 안쪽인 강북구에 존재했다.1988년 노원구를 도봉구에서 분리하면서 지명 고증을 제대로 안 했던 것이다.1861년(철종 12)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통해 노원역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이에 따르면,노원역 자리는 지하철 4호선 미아역(수유현) 아래 쪽의 북서울꿈의숲 서편이다.<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직접 답사해 제작한 지도로 정확도가 매우 높다.
조선시대 지방통제 위해 역원제 운영···전국 교통요지에 역 543개,원 1310개 설치
1415년(태종 15) 서울에서 각 지방에 이르는 도로에 30리마다 역을 하나씩 두도록 제도화했으며 주로 대로변의 주현(州縣)에 설치했다.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동북방면(양주)으로 연결되는 노원역,남부지역(경기 광주)으로 통하는 청파역(淸波釋)을 뒀다.두 역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병조에서 직접 관할했다.1419년(세종 1) 음력 1월(이하 음력) 실록도 “청파와 노원역은 인구나 물산이 메마르고 쇠잔하지만 전달하는 문서는 가장 번거롭다”라고 했다.또한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청파·노원역에는 역졸이 합해 288명이 있으며,말도 160필이나 된다고 했다.청파역 위치는 문헌에서 숭례문 밖 2리 또는 3리 지점으로 표기되며 효창공원 동편의 용산 청파동1가 일원으로 짐작된다.
<경국대전>에 소개된 전국의 역은 543개이며,역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이용율이 높은 순서에 따라 대,중,소로로 분류했다.서울 근교의 양재역,영서역(迎曙驛·은평 불광동),낙생역(樂生驛·성남 분당 역말광장),구흥역(駒興驛·용인 기흥 신갈동),벽제역(碧蹄驛·고양 덕양 대자동) 등 12개 역을 대로로 편성했다.중로는 경기의 평구역(平丘驛·남양주 삼패동)을 비롯해 각 도별로 중요 지점이었던 109개 역이 지정됐다.
역마는 관원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정승은 9마리,어사는 3마리까지 이용가능
전국의 역 중에서는 삼남(충청·전라·경상)의 도로가 한데 모이는 양재역이 가장 혼잡했다.양재역은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 재위기 익명서 사건으로 사서에 자주 등장한다.1547년(명종 2) 9월 18일 양재역 벽면에 붉은 글씨로 “여주(문정왕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1476~1552)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익명서가 붙어있는 것이 발견됐다.이 일은 문정왕후(1501~1565) 동생인 윤원형(1503~1565)이 왕후의 반대세력과 사림을 숙청한 사화사건으로 비화한다‘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이라고 한다.선조가 즉위하고 사림세력이 정계를 장악하면서 무고로 공인됐고 죽거나 피해를 당한 인물들도 복권됐다.벽서가 나붙을 만큼 역과 역 주변은 언제나 북적거렸다.역에서는 사람도 식사를 해결했지만 죽을 끓여 말도 먹였다.양재역 주변 도로의 별칭이 말죽거리가 된 이유다.
큰 역은 폭주하는 업무량으로 역졸과 역로들의 이탈이 빈번했다.<세종실록> 1448년(세종 30) 4월 4일 기사는 “양재역에서 안부역(安富驛·수안보)까지는 하삼도 요충의 길이어서 사객(使客·공무 출장 관리)이 번다하다.역리들의 전운(轉運·물자운반 업무)를 종들이 견디다 못하여 도망하는 일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원은 사적(私的)으로 이용가능,길가에 건물만 있는 경우 많아 조선후기 쇠퇴
역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교통 요지와 분기점에는 원(院)도 뒀다.원은 역과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원은 고려시대 불교사찰에서 운영하던 숙소였지만 역로망이 강화되며 국가시설로 흡수됐다.원은 공무가 아니더라도 이용할 수 있어 역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전국의 원은 1310개소다.그중 서울 권역이거나 인접 지역은 △한성부 4개 : 보제원(고려대 앞 안암오거리),홍제원(서대문 홍제동),이태원(용산고 정문),전관원(행당중 정문) △양주목 6개 : 덕해원(누원 또는 누원점·1호선 도봉산역 맞은편),도제원(토원 또는 퇴계원·남양주 퇴계원리) 등 △광주목 16개 : 사평원(한남대교 남단),광진원(광나루 북쪽 언덕),판교원(성남 판교동) 등 △과천현 5개 : 노량원(노량진 남쪽 언덕),인덕원(안양 인덕원사거리 일원) 등이 있다.대한민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서초 잠원동,강남 압구정·신사동의 한강변은 조선시대 사평나루로 불렸다.한양에서 지방으로 연결되는 전국도로망 중 제4로(경기 광주~판교~부산)와 제5로(용인~통영)가 사평나루를 지났다.사평나루에는 사평원(沙平院)이 섰다.사평원 위치는 신사중 일원으로 추정한다.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 사평나루에는 장시도 크게 열려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사평장은 전국 15대 향시(鄕市·지방 정기시장)로 번성했다.지금은 한강개발과 아파트 건설로 사평원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18세기 이후 상업발달하며 점막(店幕)이 원 대체,주변에 큰 시장도 형성
조선후기 문을 닫는 원이 많았고 대신 그 자리에 점막(店幕·주막촌)이 들어섰다.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은 “이른바 원이라는 것은 주인이 없는 빈집을 길 위에 지어놓은 것이어서 대부분 황폐화하였고 폐지되어 오래가지 못하였다”라고 했다.점막은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운영하며 역처럼 여행객들에게 음식과 숙박을 제공했으며 18세기 이후 상업인구의 증가와 함께 늘어나게 됐다.고지도와 문헌 등을 통해 확인되는 점막은 △양주 누원점(樓院店) 또는 누원(다락원) △수유현점(지하철 4호선 미아역 주변) △오가문점(도봉 방학동 추정) △송파점(송파·석촌동) △양천 개화우점막(개화산 북쪽) △시흥행궁 앞 점막(금천 시흥5동) △고양 신점(新店) 등이 있다.이는 일부일 뿐이고 최대 상품시장인 서울과 통하는 대로에 훨씬 많은 수의 점막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도봉산 초입의 누원점,상선 정박지 송파점 곡물·어물 독점하며 유통경제 중심지로 번성
외국사신이 머물던 곳은 별도로 존재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조선시대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하던 국영 객관(客館)은 태평관(太平館),모화관(慕華館),동평관(東平館),북평관(北平館) 등이다.태평관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숭례문 안 황화방(중구 태평로 2가 신한은행 본점)에 마련했고,모화관 역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돈의문 서북쪽(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에 지었다.동평관은 일본,북평관은 여진 사신을 위한 객관이다.동평관은 종로4가 덕수중 앞,북평관은 종로 6가 흥인지문 안쪽에 표지석이 있다.<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경국대전.읍지.일성록.반계수록(유형원).대동여지도(김정호)
2.조선시대 경기연구.서울역사편찬원.2019
3.조선시대 한성부의 역할.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2013
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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