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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온라인상에는 범죄자들의 이름을 공개해 망신을 주는 SNS와 웹사이트가 우후죽순 생겨났다.중벌주의 흐름이 낳은 신상 공개는 가해자의 눈으로 사건을 본다.
유튜브 채널‘나락보관소’는 최근 2004년 밀양 성폭행 사건을 다뤄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유튜브‘나락보관소’갈무리 나락은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죄를 지은 중생이 가는 세계,
롯데 응원탁자석지옥을 뜻한다.신원 불명의 유튜버‘나락보관소’는 일명‘사이버 레커’다.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자극적 사건들을 짧은 영상으로 다루고 조회수 장사를 한다.6월1일부터 나락보관소가 다루어온 이슈는 2004년 밀양 성폭행 사건이었다.당시 가해자의 신상과 근황을 공개해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영상 조회수는 300만을 넘겼고 폭로된 가해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사이버 레커의‘정의 구현’은 위태롭게 계속되고 있다.
밀양 성폭행 사건은 남자 고등학생들이 여학생을 약 11개월간 성적으로 학대한 범죄다.경찰이 송치한 가해자는 총 44명,망을 보는 등의 간접 가담자를 더하면 100명이 넘는다.수사와 재판에는 문제가 많았다.경찰은 형사과 사무실에 피의자 41명을 세워놓고 피해자에게 범인을 지목하도록 했다.피해자에게 모욕적 발언을 한 경찰관도 있었다.당시 성범죄는 친고죄였다.피해자 가족과 합의한 몇몇 가해자는 기소할 수 없었다.그 결과 특수강간 및 강제추행죄로 기소된 가해자는 10명.2005년 4월12일 울산지법 제3형사부(황진효 부장판사)는 가해자 10명에게 소년원 송치,보호관찰 처분을 내렸다.전과가 남지 않았다.
6월1일 나락보관소가‘밀양 성폭행 사건 주동자 ○○○,
롯데 응원탁자석넌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봐’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며 20년 전 사건이 수면 위에 떠올랐다.나락보관소는 외식사업가 겸 방송인 백종원씨의 2년 전 유튜브 영상을 지목했다.영상에 등장하는 식당 종업원이 밀양 성폭행 사건 주범이라는 것이다.가해자의 이름과 나이,직장,SNS에 쓴 말 등 주요 신상정보를 공개했다.누리꾼들은 가해자로 지목된 자뿐만 아니라,그가 일한다고 알려진 식당 사장의 SNS 계정에도 찾아가 비난 메시지를 퍼부었다.다음 날 식당은 폐업했다.나락보관소는 6월5일 “피해자 측과 대화를 나눴고 (가해자) 44명 모두 공개하겠다”라고 밝혔다.나락보관소 외에도 몇몇 유튜버가 뒤따라 신상을 공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나락보관소가 폭로한 사람 중 하나는 사건과 무관한 인물로 밝혀졌다‘가해자의 여자친구’로 지목된 그는 누리꾼들의 인신공격을 받고 영업장 전화번호를 바꾸는 등 피해를 입었다.나락보관소는 뒤늦게 “사실이 아니었다”라고 인정했다.폭로가 빗나가자 온라인상에는‘나락보관소는 불분명한 제보에 의존할 뿐 가해자 명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도 나왔다.
분명치 않은 신상 공개의 효과
피해자 보호 문제도 제기됐다.6월5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사건 피해자 측은 나락보관소가 첫 영상을 게시하기 전까지 해당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사전 동의를 질문받은 바도 없다.해당 영상이 업로드된 후 6월3일 영상 삭제 요청을 했다.피해자와 가족 측은 향후 44명 모두 공개하는 방향에 동의한 바 없다”라고 밝혔다.한국성폭력상담소는 밀양 사건 피해자 지원단체 중 하나다.나락보관소는 6월7일 유튜브 영상을 없앤 뒤 “피해자의 간곡한 요청으로 폭로 영상을 내린다”라고 적었으나,한국성폭력상담소는 당일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라고 밝혔다.
‘디지털교도소’1기 운영자가 2020년 10월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강제 송환되고 있다.©연합뉴스 이 일은 사적 제재의 위험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례처럼 보인다.지난 몇 년간 온라인상에는 범죄자들의 이름을 공개해 망신을 주는 SNS,웹사이트가 우후죽순 생겨났다.이들 대부분이 부정확한 정보로 종종 애먼 사람을 잡았다‘디지털교도소’사건이 대표적이다.이 웹사이트는 2020년 3월 개설해 “악성 범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비판하며,
롯데 응원탁자석성범죄자와 살인자 등의 신상을 공개했다.이 명단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엉뚱한 사람이 강력범죄자로 내몰리고,신상이 공개된 대학생 한 명은 스트레스를 호소하다 사망했다.2020년 9월 검거된 디지털교도소 운영자는 해외 도피 중인 마약사범으로 드러났다.온라인에서 활동하던 여러 웹사이트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런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사적 제재보다 좀 더 예민한 질문도 마주하게 된다.엄밀한 검증을 거치고 피해자 동의를 얻어‘진짜 범죄자’의 신상을 드러낸다면 그건 괜찮을까?밀양 사건에서 보듯 국가가 집행하는 사법도 늘 완전하지는 않다.사이버 레커나 도주 중인 범죄자가 아니라 믿을 만한 이들이 나선다면 이 허점을‘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언론의 역할을 생각해볼 수 있다.미국 언론은 검거와 수사 단계부터 강력범죄 피의자의 이름과 얼굴,주소 등을 보도한다.반면 한국은 선제적으로 실명을 공개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형법에 따라‘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한다.말 그대로,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도 명예를 훼손했다면 처벌하는 조항이다.다만 법리상 보도 내용에 공익성이 있다면 위법하지 않다.그러나 범인의 신상은 여기서 예외라고 1998년 대법원은 밝혔다.“(범죄자가) 공적 인물이 아닌 이상 (중략) 범죄에 대해서는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더라도,그 범인이 특정인이라는 사실까지 알아야 할 이익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이 판결 이후 범죄자 신상정보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한정적으로 공개된다.창구가 국가로 일원화된 상황에서,사적 제재가 정밀하지 못하다면 정부가 범죄자 공개 범위를 넓히면 된다.여론은 찬성이 압도적이다.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가 국민 7196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96.3%가 강력범죄자 신상 공개 확대에 찬성했다.95.5%는 범죄자 동의 없이도 최근 사진을 공개해야 한다고 답했다.믿을 수 없는 온라인상의 개인이나 소송 위험을 지는 언론 대신,국가가 직접 범죄자의 신상을 낱낱이 드러내는 방안도 있다.
학계는 문제를 제기한다.범죄자 신상 공개의 효과가 분명치 않다.실증적 연구 결과는 범죄를 줄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기운다.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20년 펴낸‘중형주의 형사제재의 실효성 평가연구’는 신상 공개제도의 효과를 검증한 미국 연구들을 소개했다.결론적으로 연구자들은 이 제도의 “재범 억제 효과를 발견하지 못하였다”.신상정보 공개 범죄자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재범 비율을 비교했다.재체포,재기소,재복역 비율 등에서 두 집단은 차이가 없었다.오히려 성범죄로 다시 체포되기까지의 기간은 신상 공개 집단이 더 짧았다는 연구도 나왔다.초범 예방에도 유의미한 효과가 없었다.발생 건수가 늘어난 지역도 있었다.한국은 2000년 처음 신상정보 공개 제도를 시행했다.논문은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성폭력 범죄자 중 초범 비율은 40.3%에서 2011년 54%로 늘었다”라며 “잠정적으로 일반 예방효과가 없음을 보여준다”라고 적었다.
‘피해자의 눈’으로 사건을 본다면
법학계에서는 신상정보 공개제도 자체가 범죄 예방보다는 처벌 가중에 초점을 둔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한국의‘솜방망이 처벌’에 견주어 소개되는 화학적 거세,취업 제한 등의 무거운 처벌이 포퓰리즘 산물이라는 비판이 있다.권태상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20년 논문‘범죄자 신상 공개와 인격권’에서 “치료와 교정 및 재사회화를 기조로 하는 형사정책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중벌주의 형사정책이 대두되었고,범죄자 신상정보 등록 및 공개제도는 이에 기초한 것”이라는 견해를 소개한다.
유럽은 상황이 다르다.영국은 개별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고,지역별 숫자만 공개한다.프랑스 역시 대중에게 정보를 공개하지는 않는다.치료명령 등 성범죄자에 대한 의료적 접근을 선호한다.권 교수는‘미국식’신상 공개는 포퓰리즘 외에 “특유의 사회·문화적 풍토도 한 원인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특히 중시한다.판결문을 익명화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재판 기록을 전부 볼 수 있다.이 과정에서 피해자 신상이 드러난 적도 있다.정보공개에 대해 다른 나라들보다 더 개방적이다.” 한국의 범죄 처벌이 유독 가볍고 범죄자 인권만 챙기는 게 아니라,각국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사법정책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6월13일 서울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밀양 성폭력 사건 관련 기자간담회가 열렸다.©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중벌주의 흐름이 낳은 신상 공개는 가해자의 눈으로 사건을 본다.말하자면‘어떻게 하면 가해자가 더 큰 타격을 받을지’에 대한 해답이 범죄자 신상 공개다.그런데 우리는 신상이 공개된 가해자의 다음 계획까지 계산하고 있을까?밀양 사건 가해자가 종업원으로 일한 가게는 문을 닫았고 또 다른 가해자는 회사에서 해고됐다.이 밖에 다른 가해자들도 신상 공개 후 생업을 그만두게 된 상황으로 알려져 있다.동네 식당에도 취업할 수 없게 된 전과자들이 다시 범죄에 손댈 확률은 더 높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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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상 교수는 “누구나 심정적으로는 가해자를 사회에서 격리하고 싶고,그가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데 살길 바랄 것이다.100% 가능하지 않다.이런 식으로 몰리다 보면 화풀이 범죄를 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이론적으로 법을 바꿔 범죄자 대다수를 영구히 사회에서 격리한다면 재범 가능성은 줄어든다.그러나 이는 법체계 전반을 뜯어고쳐야 하고,교정시설의 한계라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신상 공개가 그렇듯,무거운 형량이 정말 범죄 의사를 줄이는지도 논쟁적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소장은 6월12일 기자간담회에서‘피해자의 눈’으로 사건을 보자고 말했다.그는 피해자 동의 없는 사건 재조명을 두고 2004년 언론과 경찰의 태도를 떠올렸다.“피해자의 동의 없이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확보하고,확산하고,피해자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과 방식으로 재현하는 문제는,2004년 방송사와 경찰의 문제에서 2024년 유튜버의 문제로 바뀌며 반복된다.” 김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에서 평온할 권리”가 국민의 알권리에 우선하는 생존권이라고 덧붙였다.6월13일 이 단체는 피해자 후원 모금을 시작했다.후원금은 전액 피해자 생계비로 쓴다고 밝혔다.
디지털교도소 운영자처럼 나락보관소 역시 검거될 것이다.그가 검거되면 이번 사건은‘조회수에 눈이 먼 사이버 레커의 헛발질’쯤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그러나 너절해 보이는 메신저나 사적 제재라는 주제에만 갇히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20년 전 흉악 범죄자를‘나락’에 보내는 게 공익에 어떤 이점을 주는지도 여기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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