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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 도중 경호원에 의해 퇴장당하는 후진타오 전 주석(가운데).photo 뉴시스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저우언라이 총리는 양국 관계가 앞으로 태평(太平)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로 '태평후괴(太平猴魁)'를 국가 공식 국예차(國禮茶)로 선물했다.2007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진타오 주석이 우호증진 의지를 상징하는 뜻으로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게 증정한 차도 태평후괴였다.생산량이 워낙 적기도 했지만 태평후괴는 한동안 물량이 없어 못 팔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태평후괴는 2004년 열린 상하이 국제차박람회에서 '녹차 왕'에 오르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태평후괴는 2005년 경매에서 특등급 100g이 3000만원에 낙찰되면서 중국 전역을 놀라게 했다.높은 낙찰가격은 물론 유서 깊은 다른 명차에 비하면 듣보잡에 불과했던 태평후괴의 약진은 중국 차 시장에서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태평후괴는 중국의 명산 황산이 태평호수와 만나는 곳에서 생산되는 차로 1900년 왕괴성(王魁成)이 안후이성(安徽省) 태평현 후갱(猴坑)에서 창제한 녹차로 알려져 있다.
'찻집 아들' 후진타오
2004년 9월 19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하며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된 후진타오의 공식적인 고향은 안후이성 지시(積溪)현이다.비슷한 시기 안후이성 특산물인 태평후괴가 약진한 데는 어쩌면 '주석 찬스'가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같은 지역 출신 최고 권력자의 후광을 입고 약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그런데 후진타오의 진짜 출생지는 안후이성이 아니다.후진타오는 장쑤성(江蘇省) 타이저우시(泰州市)에서 1942년 12월 21일 전쟁 중에 태어나 칭화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타이저우시에서 성장했다.
사실 차와의 인연이 깊은 인물은 그의 아버지였다.그의 아버지 후쩡위(胡增玉)는 조상들이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안후이성에서 차(茶) 가게를 운영했다.부유했던 후쩡위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전 재산을 잃고 혈혈단신 상하이로 와서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했다.지인의 소개로 용담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리원뤠이(李文瑞)를 만나 결혼했고 2년 만에 후진타오가 태어났다.부부 교사의 맏아들답게 후진타오는 공부를 잘했다.1947년 후쩡위는 가업인 찻집을 다시 열어 운영했다.후진타오가 초등학생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찻집 아들 후진타오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고향의 차인 태평후괴의 맛과 역사를 잘 알 수밖에 없었다.태평후괴는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차지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했다.태평후괴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지만 그 무렵 중국은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그 후 40년에 걸친 혼란기 동안 태평후괴도 길고 깊은 침체기에 빠졌다.
태평후괴는 1955년 독특한 외형과 은은한 난향으로 중국 10대 명차에 이름을 올리면서 명성을 되찾았다.후진타오 역시 이 무렵부터 태평후괴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칭화대학교 수자원 보존 및 수력공학과에 합격한 그는 1959년 베이징으로 유학길에 오르며 향수병 방지 예방약으로 태평후괴를 가지고 갔다.중국 10대 명차에 오른 태평후괴의 지명도는 높아졌지만 생산량은 답보 상태였다.
1913년부터 1935년까지 연평균 500㎏이 거래됐던 차는 생산량과 거래 수요가 점점 감소해 1949년에는 불과 95㎏만이 거래됐을 정도로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하지만 신중국이 대륙을 안정시키면서 태평후괴의 생산량은 다시 500㎏ 정도로 회복됐다.덩샤오핑이 개혁과 개방으로 중국 경제에 활로를 열었지만 1986년까지도 차에 대한 수매권은 전량 국가가 쥐고 있었다.국가가 차를 수매한 다음 전 인민에게 차를 교환할 수 있는 차표(茶票)를 배급했다.
태평후괴 찻잎은 조금도 구부러지지 않은 채 쭉 펴진 날렵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photo 유튜브 품질에 곁들인 훈훈한 원숭이 미담
1987년 국가가 차를 전량 수매하는 정책을 버리자 차 생산량은 바로 2배로 늘어났고 태평후괴 역시 연간 1000㎏에 육박하는 물량이 거래됐다.태평후괴의 원산지인 태평현이 황산시 황산구로 속하면서 10여개 촌락에서도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2003년에는 거래량이 12.6t으로 비약했다.거래량의 증가뿐 아니라 2004년 녹차 왕으로도 등극한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라성같이 쟁쟁한 중국 차의 경쟁에서 신출내기에 불과한 태평후괴가 빛날 수 있었던 비결은 일단 독특한 외형에 어울리는 우월한 품질 덕분이다.태평현에서는 태평후괴의 전신으로 인정받는 태평첨차(太平尖茶)를 정수경(鄭守慶)이라는 차농(茶農)이 1859년부터 만들고 있었다.전란을 피해 황산 자락에 와서 차농으로 정착한 부친을 닮아 태평후괴의 창시자인 왕괴성 역시 차를 만드는 기술과 안목이 뛰어났다.그런데 왕괴성이 태평첨차 제조기술을 정수경에게 배운 것이다.왕괴성은 좋은 찻잎을 선택하는 선구안과 자신의 기술을 접목해 최고 품질의 차를 선보였다.
왕괴성은 운무로 뒤덮인 해발 800m 이상의 다원에서 어린 싹을 감싼 2장의 어린 찻잎을 채취해 가공했다.살청(殺靑)한 찻잎을 유념(찻잎을 비벼 세포막을 파괴해 유효성분이 쉽게 용출되게 하는 제조기법)을 거치지 않고 하나하나 손으로 펼쳐서 만들었다.완성된 찻잎의 몸체는 편평하고 조금도 구부러지지 않은 채 쭉 펴진 날렵한 모양을 갖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유념 과정 없이 만들어진 차는 다른 녹차와 달리 여러 번 우려낼 수 있었다.맛과 향도 뛰어난 태평후괴는 태평첨차의 최고봉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난징과 우한 같은 대도시의 차관과 차 판매점은 태평현의 차를 선호했다.그중에서도 왕괴성이 만든 차를 으뜸으로 쳐서 최고가에 거래했다.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차의 세계에서 막내 격인 태평후괴가 상종가를 치는 이유에는 이런 명성과 품질 외에도 재미난 스토리가 양념처럼 들어있다.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절벽에 있는 차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하기 위해 원숭이를 훈련시켜 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또 신혼 첫날밤 여인의 꿈에 등장하는 산신령 버전과 황제가 등장하는 뻔한 설화도 있다.
가장 많이 유통되는 전설은 설정과 내용은 다소 다르지만 결국 은혜를 갚는 원숭이로 귀결되는 이야기다.태평후괴의 원산지인 후갱은 원래 원숭이의 집단 서식지라는 의미에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사람도 아닌 원숭이가 은혜를 갚는다는 훈훈한 미담은 사실과 관계없이 태평후괴에 대한 친근한 매력을 만들어준다.원숭이가 알려준 뛰어난 차라는 뜻에서 '후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 전설을 듣다 보면 불과 124년 전에 이 차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순간 망각하게 된다.
같은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진 태평첨차는 정수경의 4대손이 지금도 만들고 있다.하지만 전국적인 차로 발돋움할 그럴듯한 스토리가 없는 태평첨차는 확장성 부재로 태평후괴의 그늘에 가려 지역특산물에 머물고 있다.찻집 아들 후진타오는 공청단의 대표주자로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가 8대 혁명원로의 아들인 시진핑의 그늘에 묻혀버렸다.2022년 10월 22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 도중 후진타오는 경호원의 팔에 이끌려 퇴장 조치를 당했다.후진타오는 그날 벌어진 모욕적 장면으로 존재감을 상실했지만,
아시안컵 승부차기그의 고향 차 태평후괴는 국예차로서 외국 수반에게 증정되는 명예를 여전히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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