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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수확 후 만들어 먹는 우리집 별미,수소 뜻맛의 비결은 '손맛'【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길고 지루한 여름 장마가 시작됐다.장마가 시작되면 농촌에서는 손길이 바빠진다.딸 것은 따고 캘 것은 캐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시골집 텃밭에서 감자를 캤다.감자는 비가 많이 내리면 감자 뿌리가 쉽게 썩기 때문에 장마 전에 캐야 한다.다섯 형제가 다 모였다.시골집 앞 텃밭에 고작 4~5개 고랑이지만 농사일에 서툰 우리는 해마다 감자 캐는 날이면 모든 식구가 동원된다.
 

▲ 감자수확 수확한 감자를 마당에 널어 수분기를 제거하고 상자에 담는다.ⓒ 변영숙
 
고구마와 달리 감자 캐는 일은 쉽다.땅속 깊숙이 박힌 고구마를 캘 때는 삽까지 동원되기 일쑤지만 감자는 호미로 윗부분을 조금만 파도 아기 주먹만 한 감자가 모습을 주렁주렁 달려 나온다.

올해 감자 농사는 대체로 '풍작'이다.동네 다른 집들도 감자 농사가 잘 됐다고 한다.알도 굵고 많이 들었다고.풍작이란 말이 한편으로는 반갑지만 감자 가격이 폭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캐낸 감자를 앞마당에 널어 놓았다.동글동글 조약돌처럼 생긴 감자들이 넓지 않은 마당을 가득 채웠다.마냥 뿌듯하다.감자의 물기가 마를 때까지 잠시 마당에 널어 놓았다가 상자에 담는다.상자가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익숙한 이름들이 거명된다.큰언니,작은언니네… 그리고 201동 아주머니,수소 뜻앞집 할머니… 평소에 작은 친절을 베푼 이웃들에게 나눠 줄 요량이다.

감자를 캐면 우리 집에서는 어김없이 연중행사처럼 '감자범벅'을 만든다.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감자가 잠길 만큼 물을 붓고 찌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물을 따라 버린 다음 미리 준비한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감자에 올리고 반죽이 익을 때까지 가열한다.
 
▲ 감자범벅  여름철 별미로 강원도에서 주로 많이 먹었던 감자범벅.집집마다 조금씩 레시피가 다를 수 있다.ⓒ 변영숙
 
밀가루 반죽이 다 익으면 적당량의 설탕을 넣고 감자와 밀가루 반죽을 뒤섞어 주면 '감자범벅' 완성이다.밀가루 반죽은 소금 간을 하고 수제비 반죽보다 조금 질게 한다.

레시피는 쉽지만 감자와 밀가루 반죽의 비율을 잘 맞춰 '맛있는' 감자 범벅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밀가루 반죽이 적으면 감자 맛만 나고 밀가루 반죽이 질면 쫀득쫀득한 맛이 떨어진다.결국 감자범벅의 맛은 레시피가 아니라 '손맛'이다.전에는 늘 엄마가 해 주셨는데 지금은 막냇동생이 만든다.엄마 손맛을 막냇동생이 물려받은 모양이다.

감자범벅은 감자의 고소한 맛과 밀가루 떡의 쫄깃함이 어우러져 여름철 별미로 손색이 없다.잘 익은 시원한 열무김치와 함께 먹으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여름철 입맛 없을 때 특별식으로 해 먹어도 좋다.감자범벅은 강원도 지방의 '감자붕생이'와 비슷한데 집집마다 만드는 방법은 조금씩 차이가 나는 듯하다.

감자에는 단백질을 비롯해 비타민 C,칼륨,비타민 B6 등 다양한 영양소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면역력 증강,뼈 건강,수소 뜻혈당 안정 및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삶은 감자를 차갑게 해서 먹으면 칼로리가 반으로 줄어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무더운 여름 자칫 입맛까지 잃기 쉽다.영양 만점의 감자 음식으로 건강한 여름을 나 보자.

덧붙이는 글 | 포천소식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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