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썰]
1801년 5월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러거쉘과 에벌리 사이에서 우리는 성대한 식사를 했습니다.그리곤 우리가 얼마나 훌륭하게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최대한 노력해도 소고기의 20분의 1도 먹을 수 없었거든요.오이는 정말 만족스러운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제 삼촌이 최근에 오이 가격을 물었을 때 1실링이라고 했거든요."
식사를 대접받고 나서 제인 오스틴은 지인에게 '오이'를 선물로 준다고 합니다.선물로 웬 오이인가 싶지만 가격을 살펴보면 이해가 갑니다.영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따르면 1800년에 1실링은 오늘날 약 2.2파운드(한화 3868원) 정도입니다.또 편지에서는 제인 오스틴은‘고기는 파운드당 8펜스’(1실링은 12펜스)라고 언급했는데요,오이 한 개는 고기보다 비쌌던 식재료였던 셈입니다.
온실에서 오이를 재배하는 모습.[123rf]당시 오이는 오늘날‘루비로망’과 같이 고급 작물이었습니다.인도가 원산지인 오이는 식민지 인도로 이주한 영국인들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즐겨먹던 채소였습니다.이들은 빵 사이에 오이를 끼워 먹었는데 이 레시피가 영국 본토로 전해졌습니다.문제는 더운 지방에서 자라던 오이를 본토에서 재배하려면 개인 정원에 유리온실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이 때문에 영국 상류층들만 오이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오늘날로 치면 오이 샌드위치는 호텔 망고빙수 정도였던 셈입니다.
줄리어스 르블랑 스튜어트가 그린 '5시 차'.(1894)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 오이 샌드위치는 애프터눈 티와 함께 영국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습니다.명성에 비해 샌드위치의 재료는 단출합니다.버터를 바른 흰 빵 두 장 사이에 종잇장처럼 얇게 절인 오이를 끼우는 것이 전부입니다.
홍차와 오이 샌드위치.[게티이미지뱅크]애프터눈 티 서빙의 원칙은 풍미가 강한 음식부터 단 음식 순입니다.보통은 맨 하단 접시에 나오는 샌드위치부터 먹습니다.이때 식빵 테두리를 잘라내야 합니다.또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2~4등분해 손가락으로 고상하게 집어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니 내용물이 너무 많아도 안 됩니다.깔끔하면서도 은근히 사치를 드러내는 오이 샌드위치가 제격이었습니다.
또 이 샌드위치가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부실한 영양가 때문입니다.19세기 귀족들 사이에서는 마른 몸매가 각광받았는데 오이는 95%가 수분으로 이뤄진 만큼 열량이 거의 없습니다.고열량을 필요로 하는 고된 노동자 계층과 달리 이들에게 오이 샌드위치는 그저 즐거움을 위한 음식이었죠.
영국이 가장 번영했던 에드워드 시대(1901~1910년)에는 오이 샌드위치가 전국적으로 대유행을 합니다.산업 혁명으로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석탄으로 온실이 많아지면서 오이 생산량도 늘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여전히 중산층의 허영심을 보여주는 음식으로 여겨집니다.이 시기 영국 소설에서는 오이 샌드위치가 허영심을 상징하는 소재로 등장합니다.
[123rf]오늘날까지도 오이 샌드위치는 영국의 티타임,
네이버 뷰어오찬 모임에서 자주 등장합니다.대부분의 영국 크리켓 클럽에서는 이 샌드위치를 제공하며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오후 티타임과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여왕은 거의 매일 오이 샌드위치를 먹었다고 하는데요.버킹엄 궁전에서 가든 파티를 열 때 오이 샌드위치에 민트소스를 더한 특별한 레시피를 선보였다고 하죠.대중들은 소박한 오이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여왕을 두고 검소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지극히 귀족적인 면모를 보여준 셈입니다.
오이 샌드위치와 티푸드 [게티이미지뱅크]영국 여왕뿐 아니라 고대 로마 황제들도‘오이광’이었습니다.특히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오이를 너무 좋아해서 거의 매일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오이 때문에 인류 최초의 온실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로마의 박물학자였던 플리니우스는 책에서 제국의 정원사들이 티베리우스가 여름에만 수확하는 오이를 일년 내내 재배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합니다.정원사들은 바퀴가 달린 수레에 오이를 심고 태양을 따라 수레를 계속 옮겼다고 합니다.당시 유리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운 계절에는 오이 침대를 얇은 유약을 바른 시트로 덮어 길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