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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전선 역사투어- 강화도- 고려 대몽항쟁부터
- 조선 강화도조약까지
- 시대마다 전쟁터였던
- 교과서 속 상징적 장소
- 해안선따라 촘촘한
- 12진보 53개 돈대
- 덕진진·초지진·광성보
- 외세에 저항한 민초들
- 연미정 서면 보이는 北
- 역사는 아직 현재진행형
인천 강화도는 외침의 역사를 상징하는 섬이다.외부 침략이 있을 때마다 결사항전의 거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고려 대몽항쟁이 대표적이다.몽골 침략에 맞서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1232년) 후 38년간 버티며‘고려’를 유지했다.1627년 정묘호란 땐 조선의 임금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슬레이어 토토 점퍼9년 뒤 병자호란 때도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했지만 지체하다 남한산성에 발이 묶이면서‘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때 역시 강화도를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은 서구 열강에 맞서 조선인은 거세게 저항했다.
‘한국의 마지노선’강화도는 특히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2월)의 계절인 겨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역사 여행지다.봄방학을 맞아 최격전지 강화도 진과 보의 돈대(해안가나 접경지에 설치된 소규모 관측·방어용 요새)를 돌며 아이들과 함께‘반외세 저항의 역사’를 되짚어 보자.대몽항쟁부터 근대까지 결과적으로는 패배의 역사였으나 부당함에 맞선 완강한 저항정신만은 지지 않고 또렷이 살아 지금까지 이어진다.
▮해안선 따라 이어진 진보돈대
강화도가 역사적으로 결사항전의 거점이 된 건 지리적 환경 요인이 크다.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경계부대인 진(鎭)과 보(堡)가 설치되고 소속 돈대를 뒀는데,해킹 사이트 확인경기 김포시를 마주 보는 동쪽 해안의 방어선이 더 촘촘하다.섬 동쪽 해안이 성벽(강화외성)으로 이어지며 돈대들로 방어선을 구축한 모양새인데,서쪽과 남쪽은 너른 갯벌로 배가 섬에 닿기 힘들어 동쪽 중심으로 군사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게다가 육지와 강화도 사이 강화해협의 물살이 세(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명량해전의 울돌목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세다고 함) 본토에서 섬으로 적들이 진군하기 어려웠다.어느 방향에서도 상륙이 어려운,섬 전체가 거대한‘천혜의 요새’였던 셈이다.최적의 자연 요새였던 데다 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강화도는 임시수도 또는 군사 위성도시로서 역사의 고비 때마다 나라의 최전선 역할을 해왔다.
광성보에서 각각 차로 5분 거리인 덕진진(사적 226호)과 초지진(사적 225호)은 광성보와 한 묶음으로 둘러보면 좋다.세 곳 모두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로,병인·신미양요 때 외세에 맞선 최격전지다.신미양요 당시 초지진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까지 점령한 미군은 손돌목돈대를 함락,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려 조선을 욕보였다.일련의 외침 움직임은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초지진 등을 습격한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진다.조선은 이듬해인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항 등을 개항하면서 망국의 길을 걷는다.
▮‘최전선 역사’는 진행 중
건축미 측면에서 보자면 강화 진보돈대의 백미는 단연 월곶돈대 내 연미정(인천시 유형문화유산 24호)이다.타원형의 월곶돈대 꼭대기에 홀로 선 정자가 쓸쓸하면서도‘이 땅 지킴이’로서의 곧은 결기를 뿜어낸다.고려시대 건립된 정자로 한강과 임진강의 물길이 합해진 뒤 다시 서해와 강화해협으로 나뉘어 흐르는 곳에 위치,모양이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연미정(燕尾亭)이라 이름 붙여졌다.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청)과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장소이기도 하다.특히 연미정에 서면 바다 너머 북한인 황해도 개풍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연미정 근처 해안가에는 긴 철조망이 쳐져 이곳이 남북의 경계선임을 실감케 한다.시대마다 전쟁터였던 최전선 강화도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려준다.
연미정 남쪽의 갑곶돈대(사적 306호)는 1679년(숙종 5년) 제물진 소속으로 축조됐다.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이곳에 상륙,레볼루션 카지노강화성을 점령하고 문화유산을 약탈했다.돈대 내에는 고려 때 몽골과 외교 교섭을 벌였던 이섭정(정자)과 1234년(고려 고종 21년) 정신력 결집으로 몽골 침입에 맞서 싸우자며 강화도에서 간행한 세계 최초 금속활자책(추정) 상정고금예문을 기념하는‘세계금속활자발상 중흥기념비’도 볼 수 있다.상정고금예문 금속활자본은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아 직지심체요철(1377년)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로 인정받는다.삼랑성(정족산성·사적 130호)은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격파한 승전지다.삼랑성 내 고찰인 전등사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두던 선원보각 등‘정족산사고’가 복원돼 숱한 전쟁 속 기록 보존의 마지노선으로서도 강화도가 기능했음을 알려준다.
◆강화도의 자연환경
- 붉게 변하는 경징이풀…병자년 희생된 백성의 피일까
1231년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자 당시 실권자였던 고려 무신정권의 최우는 이듬해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이곳을 요새화했다.강화도는 1259년 몽골과 강화(사실상 항복) 후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수도로서 역할을 한다.당대 세계 최강 몽골을 상대로도 함락되지 않았던 강화도가 360여 년 뒤인 병자호란 때는 왜 그렇게 쉽게 뚫렸는지 의문이 많다.
대몽항쟁기 강화도가 뚫리지 않은 건 자연환경 덕분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강하다.섬 서쪽과 남쪽 해안은 갯벌이 많아 접근이 어려웠고,동쪽의 섬과 육지 사이 강화해협은 물살이 거세 해전에 약한 몽골군이 감히 넘보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랬던 철옹성이 병자호란 때는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렸다.전쟁 발발 직후 조선 조정은 강화도 파천을 결정하고 왕자 비빈 등을 먼저 들여보냈다.인조가 곧 뒤따랐으나 청군의 길목 차단과 폭설 등으로 강화도로 향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갇히게 된다.조선 조정과 왕실은 남한산성과 강화도에서 각각 항전했지만 청의 급습에 강화도 방어선이 빠르게 무력화됐다.부관 강진흔의 분전에도 강화도 방어 총책임자인 검찰사 김경징(전시총사령관 김류의 아들)의 무능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강화도 갯벌에는 염생식물인 나문재가 많은데‘경징이풀’이라고도 부른다.강화도를 붉은 피로 뒤덮은 김경징에 대한 원망이 담겼다.기록에 따르면 피난을 위해 김포에서 강화도로 넘어가는 배에 김경징은 그의 가솔과 짐을 먼저 태우고 다른 이는 건너가지 못하게 했다.백성,심지어 왕실 인사까지 김포나루에 발이 묶이고 적병의 추격을 받자 세자빈(강빈)이 “경징아,경징아,네가 이럴 수 있느냐”고 할 정도였다.11월이면 붉게 변하는 나문재는 병자호란 당시 희생된 백성의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지난달 찾은 석모도 칠면초(나문재속) 군락지는 붉은색은 거의 다 빠지고 옅게나마 보랏빛이 어슴프레 보였다.청이 서양 신식무기인 홍이포를 장착해 조선 수군이 역부족이었다는 등의 군사적 이유도 있다.고려 이후 수백 년간 퇴적층이 확대되면서 강화해협의 물살이 약해져 적들의 상륙을 용이하게 했다는 자연환경적 분석 역시 나온다.최전선 강화도가 뚫리자 조선은 전의를 상실했다.인조는 백기투항하며 청에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삼궤구고두례’란 치욕의 역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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