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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사실주의 미술의 거장
구스타브 쿠르베(1819~1877)
제멋대로 숱한 논란 일으켰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의 작품과 이야기
“우리나라의 중요한 보물을 훼손한 죄로 100억원(32만프랑)의 벌금형을 선고한다.벌금은 향후 32년간 나눠서 낸다.이 판결은 취소할 수 없다.”
판사의 말에 남자는 머릿속은 새하얘졌습니다‘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전 국민이 사랑하는 미남 천재 스타인 내가 이런 죄를 뒤집어써야 한다니…’남자는 억울함과 절망감에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그래,생활 바카라 후기맞아.내게 열광하는 팬들이 내 편을 들어줄 거야’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법정 안을 둘러봤습니다.하지만 기대와 달리,사람들의 얼굴에는 비웃음만 가득했습니다.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이제 저 남자 인생은 끝났어.90살이 다 될 때까지 벌금을 내기 위해 살아야 하는,벌금의 노예가 됐으니 말이야.” 잔인한 사람들 같으니라고.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구스타브 쿠르베(1819~1877).그는 당대의‘스타 화가’였습니다.끝내주는 그림 실력과 스타성으로 열광적인 팬들과 수많은 논란을 몰고 다녔지요.파리 시민들의 입에 매일같이 이름이 오르내리던 인물이었습니다.지금도 그는 19세기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힙니다.우리가 잘 아는 마네·모네·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말하자면‘인상주의의 할아버지’같은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쿠르베의 삶과 작품에 관한 정보는 한국에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편입니다‘음란물 논란’때문입니다.쿠르베는 어떤 화가였고,우리카지노 에볼루션그의 삶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음란물 논란은 또 무슨 얘기일까요.오늘 그 이야기를‘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에서 풀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만큼은 엄청나게 강했습니다.54세 때 캔버스라는 뜻의 프랑스어 단어(Toile) 철자를 틀렸다가(Toille라고 표기) 공개적으로 지적당하자,“그따위 것은 인생을 사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나 같은 위대한 사람은 단어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무식함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 같은‘자존심만 센 바보’입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미술에서만큼은 성실한 천재였습니다.스무 살 때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 그는 금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젊은 화가가 되었습니다.하지만 쿠르베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칭찬이 필요했습니다.그는 다짐했습니다‘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천재 화가야.모두에게 내 천재성을 인정받겠어’그러려면 1년에 한 번 열리는 최고 권위의 전시회‘살롱전’에 작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살롱전에 작품을 내려면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그리고 이 심사에는 고득점을 받기 좋은 일종의‘모범 답안’이 있었습니다.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혹은 역사 속의 장면에 교훈을 담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하지만 그런 그림은 쿠르베의 취향이 아니었습니다.무엇보다도 공부와 담을 쌓은 탓에 성경이나 역사를 잘 몰랐습니다.그렇게 고민하던 쿠르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잘생긴 내 얼굴을 그리면 되잖아?주제는 좀 안 맞아도 나는 엄청나게 그림을 잘 그리니까 괜찮아’그리고 놀랍게도,이런 생각은 적중했습니다.불과 나이 스물다섯살에 그는 살롱전에 작품을 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쿠르베의 이름은 프랑스 전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합니다.쿠르베의 그림 주제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과 풍경.성경이나 신화 속 위대한 영웅들을 그리던 다른 화가들에 비하면 초라했습니다.그런데 그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소재를 그린 작품들이 너무나도 새롭고 아름다웠습니다.탁월한 그림 실력과 혁신적인 기법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진이 발명(1826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사진 기술을 보고 영감을 받은 쿠르베는 사진의 기법을 그림에 접목했습니다.예를 들면 풍경화를 그릴 때 풍경의 전체를 그리는 게 아니라 특정 부분을 잘라내고(크롭),극적인 구도를 구성하고,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그 반사의 세부 사항까지 치밀하게 그려내는 식이었습니다.“사실주의의 대가”.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는 쿠르베를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쿠르베가 그린 사실주의 작품들은 인상주의를 탄생시키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마네,모네,르누아르,피사로,세잔 등은 그를 깊이 존경했고,늘 “쿠르베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다.우리는 그에게 정말 많은 빚을 졌다”고 말했습니다.따지고 보면,지금 이 순간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장면을 그리겠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인상주의와 그 목표가 거의 동일하거든요.다만 인상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빛의 아름다움과 효과’에 집중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쿠르베는 이런 복잡한 얘기를 잘 몰랐습니다.정교한 이론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사진의 기법을 그림에 접목한 건 그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천재의 본능으로 그려냈을 뿐이었고,그는 평생 사실주의나 인상주의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종교적인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에 “천사를 내 눈앞에 데려와 봐라.그러면 그려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친 것도,대단한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성경 내용을 잘 몰라서 자신 없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런데도 쿠르베가 그림의 천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알았든 몰랐든,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쿠르베는 미술사의 패러다임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잘난 척이 엄청나게 심하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그에게는 수많은 어록이 있습니다.“나는 하느님처럼 그린다.”,“미술을 좀 아는 젊은이들은 모두 나를 바라본다.나는 그들의 총사령관이다.”,“모든 민주적 정신,모든 나라의 모든 여성,모든 외국인 화가들이 내 편이다.”….자신이 좋아하는 젊은 여성이 생기자 이런 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아무리 어리석다고 해도 내 아내가 되는 영광을 거절하진 않겠지.지금 기회를 놓치면 열 번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할 테니까.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프랑스 여자라도 아내로 맞을 수 있어.내 아내가 되면 모든 프랑스 여자들의 부러움을 살 거야.” 그 말을 들은 여성이 질색하며 도망가기는 했지만요.
이렇게 충격적인 수준의‘자뻑’은 그의 본성이기도 했지만,어느 정도는 의도적이기도 했습니다.“내가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을 때,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쿠르베는 말했습니다.항상 그가‘탄압받는 예술가’행세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그의 그림이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비판받았던 건 사실이지만,쿠르베는 오히려 그걸 반기고 부추겼습니다.1863년 살롱전에서 자신의 그림 전시가 거부당하자 남긴 말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그렇지 않아도 퇴짜맞고 싶었는데 잘됐군.덕분에 내 반항아로서의 명성은 더 높아졌어.이제 나는 더 부자가 될 거야.” 심지어 그는 일부러 그림을 이상하게 그려서 비판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황제가 쿠르베의 그림을 찢어버렸다느니,사람들이 침을 뱉었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퍼지면 그는 이를 바로잡지 않고 오히려 더 부추겼습니다.한편으로는 자기 그림이 비싼 값에 팔렸을 때 언론에 알렸고,살롱전에 참가하는 대신 자기 이름을 건 개인전을 열었습니다.지금으로서는 그리 이상할 것 없어 보이지만 서양미술 역사상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은 쿠르베가 처음이었습니다.영화를 만들면 무조건 극장에 걸고 신문 광고를 하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유튜브에 직접 영화를 올리고 SNS에 홍보한 것과 같은,그야말로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이었지요.
어설픈 실력이라면 이런 자기 홍보가 독으로 작용했을 겁니다.하지만 누가 봐도 탁월한 실력 덕분에 엄청난 홍보 효과가 발생했습니다.젊은 시절부터 쿠르베는 “들라크루아와 잉그르를 잇는 다음 세대의 대표 거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처음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지만,그 소개는 점차 현실이 되어갔습니다.쿠르베는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쏟아지는 그림 주문을 받아 큰돈을 벌었고,유럽 각국의 인정을 받아 여러 나라의 훈장을 받았습니다.쿠르베를 거부했던 프랑스 미술계도 결국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르베가 평범한 여성들을 모델로 한 누드 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에도 노이즈 마케팅의 의도는 있었습니다.당시까지만 해도 여성의 누드를 그리려면 반드시 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를 끌어와야 했습니다.현실의 여성 누드를 그리는 건 음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쿠르베는 현실적인 여성의 신체를 가감 없이 그려냈습니다.다만 이는 오늘날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주기도 합니다.글 앞부분에서 언급했던‘음란물 논란’때문입니다.
벌거벗고 다리를 벌린 여성을 가슴부터 넓적다리 중간까지 그린 작품‘세상의 기원’은 그의 예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림.하지만 그 이미지가 얼마나 노골적인지,21세기 서양에서도 그 작품 이미지 업로드를 놓고 논란이 일어날 정도입니다.한국에서는 어떨까요.사회 통념을 생각하면,출판물이나 기사에서 소개하기가 다소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쿠르베의 국내 인지도가 그 중요성에 못 미치는 데는 이런 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여기서도 원본이 아닌 작품이 등장하는 영화 포스터를 대신 소개합니다‘음란물이 아닌 예술’이라는 게 전 세계적인 평가라서,원본이 궁금하신 분은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국가는 예술과 관련된 문제에 무능합니다.국가의 개입은 예술가에게 족쇄를 채우고 예술에 해를 끼칠 뿐입니다.제발 예술에서 손을 떼고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십시오.제게 주시는 영예를 거절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나는 쉰 살이고 항상 자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그러니 내 삶을 자유롭게 끝내게 해주십시오.내가 죽으면‘그는 어떤 학교에도,어떤 교회에도,어떤 기관에도,어떤 아카데미에도,무엇보다도 자유의 정권을 제외한 어떤 정권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당시 프랑스 정부에 대한 파리 시민의 민심은 바닥이었습니다.선언문이 발표되자 쿠르베에게는 “용기 있는 존경스러운 예술가”라는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다만 쿠르베에게 심오한 사상이나 정치적인 식견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그가 이런 행동을 한 건 사실‘멋있고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1870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거절하면서도,1867년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주는 훈장은 냉큼 받아 자랑하고 다닌 게 그 증거였습니다.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 주민들을 어른이든 아이든 잔혹하게 학살하고 착취한 희대의 폭군이자 살인마였거든요.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프랑스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고,프랑스 내에서 쿠르베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여기까진 좋았습니다.
이듬해인 1871년,쿠르베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파리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기존의 정부가 무너지고,사회민주주의 정부인‘파리 코뮌’이 들어선 게 계기였습니다.옛 정부에 대항하는 상징과도 같았던 쿠르베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예술위원회 의장이 되었습니다‘파리 예술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자리였습니다.그는 생전 처음 잡아보는 권력에 도취됐습니다.쿠르베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파리 시민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습니다.하루 열두 시간 동안 회의하며 어려운 사회 문제들을 논하느라 머리가 아프지만,파리는 지금 시민들의 진정한 천국입니다.제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쿠르베는 신나게 권력을 휘둘렀습니다.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여러 국보급 유물을 보호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하지만 실책도 여럿 저질렀습니다.대표적인 게 파리의 방돔 광장에 있던‘방돔 기둥’을 철거한 것.1803년 나폴레옹이 세운 이 청동 기둥은,정부에 반감을 가진 이들에게 오랫동안 제국주의와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기둥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사람들은 쿠르베에게 달려가 “우리들 세상이 왔으니 저 흉물을 치워버리자”고 했습니다.쿠르베는 그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현실 정치와 예술의 만남은 늘 비극을 낳습니다.쿠르베가 말했듯 정치가들이 예술가들에게 참견하는 건 촌스럽고 구린 일.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정치가들이 예술에 전문성이 없는 것처럼 예술가들 역시 정치나 정책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게다가 예술적 직관과 순수한 충동이 중요한 예술은,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고 조율해야 하는 정치와는 성질이 잘 맞지 않습니다.그래서 역사를 보면 위대한 예술가들이 정치에 엮이면 대부분 피를 봅니다.쿠르베도 그랬습니다.
“억울합니다!” 쿠르베는 주장했습니다.사실 그렇게 얘기할 만도 했습니다.쿠르베가 방돔 기둥 철거에 찬성한 건 맞지만,따지고 보면 이는 사람들의 요청을 들어줬을 뿐입니다.게다가 쿠르베는 최종 결정권자도 아니었습니다.이론적으로만 보면 그는‘주범’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간 쌓아온 노이즈 마케팅의 업보가 쿠르베의 발목을 잡았습니다.오랜 세월 그는 많은 적을 만들어왔습니다.잘난 척이 지나쳤고,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을 빈정거리며 깔아뭉개곤 했으니까요.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는‘권위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예술의 투사’였습니다.쿠르베 자신도 이로 인한 명성과 이익을 즐겨왔고,덕분에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습니다.그러니 새로 들어선 정부 입장에서 쿠르베는 이상적인 희생자였습니다.결국 그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됐습니다.쿠르베가 주범으로 지목되자 평소 쿠르베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벼르던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결국 그는 32만3000프랑,지금 한국 돈으로 가치를 환산했을 때 100억~200억원에 달하는 벌금과 기둥 복구 비용을 내게 됐습니다.여기에 더해 정부는 “매년 1만프랑씩 33년간 벌금을 지불하라”고 했습니다.항소도 불가능했습니다.개인이 갚을 수 있는 규모도 아닐뿐더러,판결이 내려졌을 때 쿠르베의 나이는 이미 54세.사실상‘죽을 때까지 돈 벌어서 벌금만 내라’는 얘기였습니다.판결이 선고된 날 쿠르베의 세상은 무너졌습니다.
방돔 기둥은 곧바로 다시 복구됐습니다.사람들은 기둥을 볼 때마다 쿠르베를 비웃었습니다.쿠르베는 막대한 벌금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쳤습니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큰 빚을 져서,빚을 갚기 위해 계속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그리고 3년 뒤인 1877년,스트레스로 인해 그간 앓던 간 질환이 악화돼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았습니다.몸이 퉁퉁 부어서 20L에 달하는 체액을 빼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마음 내키는 대로 거침없이 살던 천재 화가의 삶은 그렇게 최후까지 극적이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쿠르베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다만 쿠르베가 자부심을 가졌던‘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그림’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비유나 상징이 1차원적이라 거장답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사실 쿠르베는 같은 시대의 평론가들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듣곤 했습니다.작가이자 평론가였던 샹플뢰리가 대표적입니다.“쿠르베는 풍경이나 정물과 같은 단순한 주제를 그려야 합니다.그게 쿠르베의 진정한 재능이자 소명입니다.그 사람은 상징주의나 풍자에는 영 재능이 없다고요!”
그럼에도 쿠르베는 미술사의 전설입니다.그건 미술의 본질을 말하는 쿠르베의 작품들,즉 풍경화·초상화·정물화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그의 작품은 아름답고,힘 있고,혁신적입니다.그래서 안타깝습니다.정치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그는 더욱 위대한 성취를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정치는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일이긴 해도,거기에 매몰돼 자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그의 삶은 들려주는 듯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주의 특별전에서 쿠르베의 '고양이와 여인',모네의 '수련' 등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만나실 수 있습니다.전시는 5월 26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기사는 Gustave Courbet(Gerstle Mack 지음),Gustave Courbet(Fabrice Masanes 지음),Gustave Courbet(Sylvain Amic 등 지음,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도록),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줄리언 반스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가,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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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픽 토토 - 2025년 실시간 업데이트:[이투데이/고대영 기자(kodae0@e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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