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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 노루오줌
습기 많은 곳에서 무럭무럭
식물마다 생육 환경 제각각
영국 왕자 웨딩 장식으로‘화제’
화분 선물을 받아본 사람은 다 느껴봤을 것이다.고마운데,정말 고마운데 부담스러운 그 애매하고 복잡한 감정을.최근 양치식물인 홍지네고사리 화분 키트를 선물 받은 나도 마찬가지였다‘어둡고 환기가 안 되는 실내보다 야외에 심는 게 낫지 않을까’잘 키울 자신이 없다는 생각을 애써 감추며 앙증맞은 홍지네고사리 새싹을 수목원 기숙사 야외 화단에 심었다.바람대로 홍지네고사리는 잘 자랐을까.어림도 없었다.심은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짧은 생을 마감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그늘이 있는 곳에서 잘 자라는 양치식물이라 주변에 키 큰 화초가 있는 곳에 심었는데,매도 대사마침 햇빛을 받는 방향이 서향인 게 문제였다.홍지네고사리는 초여름 서해안의 길고 긴 일몰을 견디지 못하고 잎끝부터 붉게 타들어갔다.식물 식재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매도 대사즉‘심고자 하는 식물의 자생지 환경을 이해하고 비슷한 조건을 찾거나 조성한 후 식재한다’는 적재적소의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뿌리에서 오줌 냄새가?
드넓은 수목원에서 식물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공간을 찾아주는 것은 가드너들의 가장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다.1만6천여 분류군이 넘는 수목원의 다양한 식물 중에서도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환경을 찾은 대표적인 식물로 초여름부터 한창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노루오줌’을 꼽을 수 있다.
쥐오줌풀,애기똥풀,쥐똥나무,방가지똥… 아무리 식물이어도 이름에‘오줌’이나‘똥’이 따라오는 건 좀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그러나 노루오줌은 이름과 달리 화려한 꽃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여름 식물이다.원뿔 모양으로 자란 솜털 같은 꽃은 풍성한 느낌을 자아내고,마치 고사리처럼 여러 갈래로 깊게 갈라진 잎도 섬세한 매력을 뽐낸다.바람을 따라 깃털처럼 흔들리는 노루오줌 꽃은 무더운 여름날의 정원에 특별한 색상과 질감을 더한다.품종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개화 기간도 5월 말부터 8월까지 길어 꽃이 귀한 여름 정원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물이기도 하다.수목원에서는 꽃이 시들고 난 후에도 시든 모습이 아름다워 굳이 꽃대를 자르지 않고 가을 내내 감상하기도 한다.
노루오줌은 범의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이름은 뿌리에서 노루의 오줌 냄새가 나는 특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진짜로 오줌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서 심을 때 냄새를 맡아봤는데,나는 흙냄새밖에 맡지 못했다.) 냇가나 계곡 같이 노루가 물을 마시러 오는 곳에 많이 보여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노루오줌은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 전국 산지의 그늘진 계곡가,시냇가 주변에서 군락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약 없는 사랑‘사랑과 연애의 신비‘매력적인 사랑’과 같은 낭만적인 꽃말처럼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웨딩 부케나 꽃장식으로 자주 쓰였다.특히 2018년 영국의 해리 왕자와 왕세손비 매건 마클의 결혼 부케도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은방울꽃과 함께 흰색의 풍성한 노루오줌이 장식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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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지난달 30일,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 큰 연못가에 가드너와 교육생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수목원의 입구 계단을 내려오면 큰 연못가의 화단이 한눈에 들어오는데,여름철 탐방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노루오줌을 보식(보충하여 심음)하기 위해서였다.노루오줌은 그늘지고 습한 곳을 좋아한다.정원을 구성할 때도 노루오줌은 그늘이 생기는 나무 밑동이나 울타리와 같은 구조물 근처에 심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땅은 항상 촉촉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배수도 잘돼야 하니 꽤 까다로운 조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날 가드너들은 노루오줌의 다양한 품종 가운데 풍성한 흰 꽃차례를 자랑하는 노루오줌‘디아망,짙은 붉은색이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는 노루오줌‘파날’을 각각 30주씩 심었다.식재 전에는 노루오줌 뒤로 이어질 연못의 풍경을 살리기 위해 꽃이 시들어가는 노랑꽃창포의 줄기는 잘라주고,매도 대사식재가 끝난 뒤에는 땅이 푹 젖을 정도로 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리포수목원에 최초로 들여온 노루오줌은 1976년 도입된 주름노루오줌‘페르케오’로,당시에도 큰 연못 주변에 식재됐다.1970년 설립 초반 수목 위주로 조성됐던 수목원은 1990년대 이후 화단이 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초화류(꽃이 피는 풀)도 함께 식재됐다.이후 2001~2002년 다양한 품종의 노루오줌이 도입되면서 주제 정원인 노루오줌원이 큰 연못 뒤편 땅에 약 120평 규모로 조성됐다.이곳은 원래 습지였던 곳으로 주변부보다 지형이 낮고,지하수가 땅 위로 스며드는 특성 덕분에 비가 오지 않아도 항상 촉촉한 환경을 유지한다.버드나무 등 넓게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들이 있어 그늘진 환경을 좋아하는 노루오줌이 모여 살기에 적합하다.드넓은 수목원에서 하나의 식물종이 오랜 시간을 거쳐 가장 살기 알맞은 제자리를 찾아간 셈이다.
수목원에서 일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우리 집 정원에 어떤 식물을 심으면 좋을까요?” 가장 정확한 답은’정원의 특정한 환경에서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을 심으면 된다’는 것이다.모든 식물이 해가 쨍쨍한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노루오줌이나 홍지네고사리처럼 그늘진 곳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고,낙우송처럼 물가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숨을 쉬기 위해 따로 공기뿌리를 만드는 나무도 있다.중요한 것은 식물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잘 찾아내는 것,매도 대사그래서 식물이 가장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찾고 가꾸는 일이다.
나는 이 원칙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계속 나와는 맞지 않는 곳에 뿌리내리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왕복 3시간에 이르는 출퇴근 시간이나 이리저리 사람에 치여 허덕이는 환경은 대도시라는 공간이 주는 디폴트값이라서 내 의지로는 어쩌지 못하는 일이기도 했다.
한반도의 서쪽 끝에 자리한 천리포수목원은 한 시간에 한 대씩 마을버스가 선다.가장 가까운 마트는 버스를 타고 20분을 나가야 나온다.시야 안에 바글바글한 사람보다 나무와 꽃과 바다가 더 많이 비치는 풍경은 생경하면서도 즐겁다‘슬로시티’라고 선포한 태안군답게 가끔은 시간이 0.7배속으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이게 내게 딱 알맞은 속도감 같기도 하다.당연한 말이지만 나 스스로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잘 아는 것,가장 나답게 잘 지낼 수 있는 환경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한겨레 기자로,매도 대사콘텐츠 기업 홍보팀 직원으로 일했다.말 없는 나무가 좋아서 나무의사 자격증을 땄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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