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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않고 고쳐 쓰기 촉진하는 프랑스 '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한국은 시작부터 난항혹시,지금 이 글을 보는데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고장 났을 때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고가의 물건은 고장 났을 때 어떻게 수리받을 수 있는지까지 살펴보며 신중하게 구매하지만 대부분 물건의 가격,성능 정도만 비교해 보고 구입하게 됩니다.가격과 성능에 관한 정보는 상품 구매 페이지에서 알기 쉽게 제공되는 반면,수리 정보는 따로 알아보는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알기 어렵기 때문이죠.
보통 물건을 어떻게 수리할 수 있는지는 2~3년 사용하다가 기기가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시점에 알게 됩니다.공식 수리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물건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아예 수리가 불가능하게 설계된 제품도 있어요.저도 지금 사용하는 에어팟이 배터리 교체가 불가능하게 설계된 제품이라는 사실을 구입 후 1년 반이 지났을 때 알았어요.
만약 우리가 제품을 구매할 때부터 이 제품이 얼마나 수리가 쉬운지 편하고 빠르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요?제품의 가격 옆에 이 물건이 고장 났을 때 얼마나 쉽게 수리 받을 수 있을지 표시해 준다면요?
소비자들이 수리가 안 되는 물건을 구매하게 되는 일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수리가 얼마나 편한지가 제품의 가격만큼이나 고객들의 구매를 결정하는 요인이 될 거고요.그럼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더 많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수리해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겠죠?
프랑스에서 시행되는 '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가 바로 구매 단계에서부터 제품 수리 정보를 알기 쉽게 해주는 제도입니다.2021년 1월부터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일부 전자제품에는 '수리 가능성(Indice de réparabilité)' 등급을 의무적으로 표기해야 합니다.이를 어긴 판매자는 벌금을 내요.
에어컨이나 냉장고 같은 전자제품 옆에 에너지소비 효율등급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많이 보셨을 거예요.이 에너지소비 효율등급과 함께 프랑스가 전자제품에 표기하도록 의무화한 두 번째 지표가 바로 수리 가능성 등급입니다!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처음 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는 2020년 만들어진 '낭비 방지 순환 경제법'에 포함된 제도입니다.전자제품이 고장 났을 때 바로 버리고 새로 구매하는 일을 줄이고,가급적 고쳐서 사용하도록 해 가계소비를 줄이고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입니다.버려진 전자 제품,즉 전자 폐기물은 플라스틱,금속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져있어 재활용이 어렵고 콜탄,리튬 등 희귀 광물이 사용되어 채굴로 인한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수자원 고갈,탄소 배출 등의 다양한 환경 문제를 일으키거든요.
수리해 제품 수명을 늘리면 버려지는 전자제품 양을 줄일 수 있습니다.제품을 수리하여 사용할 권리가 확대되는 것이 환경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럼,프랑스가 수리할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도입한 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알아볼까요?
대상 제품군
2021년 1월 1일부터 드럼 세탁기,스마트폰,TV,노트북,잔디 깎기(유선,무선,로봇).5가지 제품군을 대상으로 시행했고 2022년 11월부터 일반 세탁기,식기세척기,진공청소기(유선,무선,로봇),고압 세척기 이렇게 4가지 제품군이 추가되었습니다.잔디 깎기와 진공청소기가 유·무선,로봇으로 세분화되어 각각 다른 점수 기준을 사용하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등급 산출 방식
수리 가능성 등급은 5가지 기준을 종합하여 산출합니다.
- 정보 제공(매뉴얼) Documentation: 제조사가 수리에 필요한 기술적인 문서들 (수리 설명서,내부 설계도,업데이트 등)을 일정 기간 무료로 고객과 수리 기술자들에게 제공하는지를 평가합니다.
- 분해 용이성 Ease of disassembly and access,tools,fasteners: 제품의 분해 난이도,분해에 필요한 도구 유형,부품 고정 방법(나사를 사용했는지 혹은 접착제를 사용했는지) 등을 평가합니다.
- 부품 공급 원활성 Spare parts availability: 제조사가 제품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기간,부품을 주문했을 때 배송에 걸리는 시간을 종합하여 평가합니다.
- 부품 가격 Spare parts price: 제품의 가격과 부품의 가격 비율을 비교하여 평가합니다.
- 제품 특성에 따른 세부 특기사항 Specific criteria: 각 제품군의 특성에 따른 세부 기준을 통해 평가합니다.
각 기준에 따라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긴 뒤 평균을 낸 점수가 제품의 최종 수리 가능성 등급이 됩니다.프랑스 생태전환부 웹사이트에서 제품군 별로 점수를 매겨볼 수 있는 엑셀 파일을 영문 버전으로도 제공 중인데요.
그 중 스마트폰 점수표를 한번 구경해 볼까요?5가지 큰 기준 중 분해 용이성 점수 부분을 보겠습니다.
분해 용이성은 제품을 이루는 각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몇 단계 과정이 필요한지,수리에 필요한 도구,각 부분의 고정 방법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깁니다.각 부분을 분리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6단계보다 적다면 3점,6~10단계라면 2점,11~16 단계라면 1점,16단계보다 많다면 0점입니다.스마트폰은 배터리,디스플레이,전면 카메라,후면 카메라의 분해 난이도를 평가합니다.모두 최고 점수인 3점을 얻었다면 총점 12점을 만점 기준인 10점으로 변환하고,만약 점수가 1점씩 깎여서 총점 8점을 얻었다면 10점 기준으로 변환하면 6.7점이 됩니다.
부분 교체에 어떤 공구가 필요한지도 평가 기준입니다.기본 도구로 정해진 18가지 공구(드라이버,렌치,플라이어,핀셋,망치,보너스 내기 프로모션 코드커터 칼,인두기 등)만 써서 수리가 가능하다면 높은 점수를 받고 그 외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공구나 제조사에서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도구로만 수리할 수 있다면 낮은 점수를 받게 됩니다.
아무 도구 없이 혹은 기본 공구로 분해가 가능하다면 4점,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공구가 필요하다면 2점,제조사에서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도구가 필요하다면 1점,어떤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수리가 가능하지 않다면 0점입니다.스마트폰 같은 제품 중엔 제조사의 공식 서비스 센터가 공급하는 기계 없이는 부품을 고칠 수 없도록 만들어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이렇게 설계된 제품은 자가 수리를 원하는 소비자나 사설 수리점이 수리할 수 없습니다.물건을 고쳐서 쓸 확률을 크게 낮추기 때문에 낮은 점수를 주는 것이죠.
예시로 보여드린 분해 용이성 외에도 부품 가격 등도 세세한 점수 기준이 정해져있습니다.각 분야 점수를 모두 더해 평균을 내 소수점 첫째 자리까지 계산한 점수가 최종 수리 가능성 등급이 됩니다.
등급 표시 방식
최종적으로 얻은 수리 가능성 등급은 낮은 점수부터 높은 점수 순서로
0~1.9점: 빨간색
2~3.9점: 주황색
4~5.9점: 노란색
6~7.9점: 연두색
8~10점: 녹색
으로 라벨에 표시하여 소비자들이 한눈에 확인하기 쉽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제품 판매자는 구매 단계에서부터 수리 가능성 등급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품 가격이 보이는 곳과 가까이에 등급을 표기해야 합니다.온라인·오프라인 매장 모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 오프라인 매장: 진열대에 표시합니다.
- 온라인 매장: 제품 구매 페이지 혹은 제품을 장바구니에 넣을 수 있는 페이지에 등급을 표시합니다.가격이 표시되어 있는 크기와 같은 크기로,소비자가 별도의 조작을 하지 않고도 잘 볼 수 있도록 표시해야 합니다.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프랑스에서 아이폰 15를 구매하려고 하면 수리 가능성 등급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아이폰 15의 점수는 7.5점이네요.상세 내용 확인하기 버튼을 누르면 지표별 점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점수 세부 내용 접근성
판매대나 온라인 구매 페이지에는 최종 점수만 표시하도록 해두었지만,구매자가 지표별 상세한 점수를 확인하길 원하면 그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 오프라인 매장: 구매자의 요구가 있을 시,판매대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온라인 매장: "수리 가능성 등급 상세 내용" 등의 버튼을 클릭하면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제품의 제조사 또는 수입사의 경우,소비자가 상세 점수 정보 제공을 요구한 시점으로부터 15일 내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프랑스의 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아봤습니다.전자 제품 소비를 더 현명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제도로 보입니다.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 제도의 한계점과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리 가능성 등급 제도 개선이 필요한 점
1.제조업체가 직접 점수를 계산하는 시스템입니다.수리 가능성 등급을 프랑스 생태전환부에서 모니터링하고 있긴 하지만,기업이 부여한 점수를 검토하는 공식적인 위원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2.등급 계산법 자체도 개선이 필요합니다.일부 제품군,예를 들면 노트북과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보안 업데이트'와 '시스템 업그레이드' 같이 업데이트의 유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공짜 점수"나 다름없는 점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3.알 수 있는 정보가 제품의 수리 가능성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제품의 내구성이나 지속가능성,보너스 내기 프로모션 코드예비 부품의 품질에 관한 정보는 알 수 없습니다.만약 기업이 낮은 품질의 부품만을 제공할 경우 수리 가능 점수는 높을 수 있지만 수리한 제품이 금방 다시 고장이 난다거나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2025년부터 TV와 세탁기에 한 해 내구성까지 평가하는 내구성 지수 Durability index를 표시하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할 예정이지만 적용 제품군의 확대가 꼭 필요합니다.
4.제도가 적용되는 제품군이 8가지밖에 되지 않습니다.2021년에는 드럼 세탁기,스마트폰,TV,노트북,잔디깎이(유선,무선,로봇 포함).총 5종의 제품만이 수리 용이성 등급 제도가 적용되는 제품이었고 2022년 11월에 일반 세탁기,식기세척기,고압세척기,진공청소기 (유선,무선,로봇 포함)이 적용 대상 제품군으로 포함되었습니다.아이패드나 갤럭시탭 같은 태블릿 PC나 스마트워치뿐만 아니라 전자레인지나 냉장고 같은 제품들도 수리 용이성 등급 제도가 적용된 품목이 아닌 것이죠.앞으로 대상 품목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모든 전자제품에서 수리 용이성 등급이 표시될 때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벨기에가 2026년부터 수리 용이성 등급 제도를 시행하기로 했습니다.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수리 용이성 등급 제도를 도입하는 국가가 되겠네요.
우리나라도 작년 7월 중순 '자원효율등급제'라는 제도를 산업통상자원부가 시범사업으로 진행해 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삼성전자,다이슨 등의 기업 제품들에 시범적으로 수리 용이성 점수를 표시하도록 해서 제도를 도입할 기초를 마련할 계획이었죠.'K-에코디자인 협의체' 발족식을 개최하고 자원효율등급제 시범사업 추진계획을 업계와 논의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예산 삭감으로 인해 이 계획이 좌초되었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를 도입하고 EU가 에코디자인 규정을 통과시키며 제품의 수명을 늘리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고 있는 반면,한국은 이런 국제적인 흐름에 발맞출 제도 준비가 시작부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수리할 권리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의식 변화뿐만이 아니라 수리가 쉬운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이 필수적입니다.프랑스 수리 가능성 등급 표시 제도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수리할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움직임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서울환경연합은 '자원효율등급제'와 같은 제도가 한국에 이른 시일 내에 도입될 수 있도록 수리할 권리 법안 확대를 위한 서명운동,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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