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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일본군과의 전투 중 중병 걸려···"인삼 먹고 건강 회복"
중국·동남아 인삼상회,해외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도 수행

[편집자 주]

시사저널은 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의 특별기고를 게재합니다.이원혁 이사장은 KBS에서 '근현대사 전문PD'로 항일 역사의 현장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왔으며,특히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동남아 국가의 독립투쟁사 조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본지에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2018~20년)를 연재하기도 했습니다.최근 베트남 르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내용을 광복절을 맞아 본지에 기고해 왔습니다.       

정확히 60년 전,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 8월7일.미국은 자기들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삼아 북베트남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era한 달 뒤 한국군의 1차 파병이 이뤄졌다.한국은 베트남에 8년 동안 모두 31만여 명의 병력을 보내 미국 다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한 나라가 되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흐른 지금,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베트남이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3대 무역 상대국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이러한 변화는 "역사란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설킨 불가사의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딘호와현에 있는 호찌민이 거주한 원두막과 피신처로 사용한 땅굴 ⓒ이원혁
딘호와현에 있는 호찌민이 거주한 원두막과 피신처로 사용한 땅굴 ⓒ이원혁

당시 베트남 신문 "고려인삼 아니었다면 호찌민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

지난 10여 년 동안 전 세계 독립운동의 현장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일에 매달려온 필자는 올해 7월13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북부에 있는 타이응우옌성(省) 딘호와현(縣)을 찾았다.거리는 140km 정도였지만 산세가 험하고 도로 사정이 열악해서 하노이에서 출발해 4시간이 넘어 도착했다.딘호와현과 그 주변은 베트남 국민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프랑스,일본,미국을 차례로 물리친 베트남의 빛나는 항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은 7년 동안 이 지역의 밀림 속에서 항불,항일 무장항쟁을 지휘했다. 

호찌민이 머물렀던 오두막과 은신처로 삼았던 땅굴,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무릎 꿇린 디엔비엔푸 전투를 결정한 장소 등 치열한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촬영을 마치고 딘호와 지역 전쟁기념관을 찾아갔다.기념관 전시물은 호찌민의 삶이 그랬듯 화려하거나 위세를 느낄만한 것이 없었다.대부분 조그마한 소품들이어서 어떻게 그런 장비로 강대국 정규군과 싸웠을까 의아했다.기념관을 대충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한 전시물에 시선이 끌렸다. 

1945년 7월 호찌민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중병에 걸려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그때 지역 유지인 마딘떱이 준 인삼을 먹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연이 담긴 전시물이었다.인삼이 한국산이었을까,아니면 중국산이나 미국산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박물관 관리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고려인삼이라고 대답했다.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박물관에서 펴낸 책을 살펴보았다.책 속에는 길이 13cm 정도의 한 뿌리와 반 쯤 사용한 '고려인삼'이라는 설명이 들어있었다.호찌민과 우리를 연결하는 운명과도 같은 전율이 느껴졌다. 

딘호와 전쟁기념관의 관리인이 호찌민에게 고려인삼을 준 마딘떱 사진과 당위원회가 수여한 표창장을 소개하는 모습 ⓒ이원혁
딘호와 전쟁기념관의 관리인이 호찌민에게 고려인삼을 준 마딘떱 사진과 당위원회가 수여한 표창장을 소개하는 모습 ⓒ이원혁


하노이로 돌아온 필자는 통역자와 함께 '호찌민 인삼'의 뒷얘기를 추적했다.2009년에 나온 '사이공해방신문'과 '타이응우옌뉴스' 2012년 판에서 관련 기사를 찾아냈다.두 신문은 공신력이 높은 지역 공산당 기관지다.기사에는 '고려인삼이 아니었다면 호삼촌(호찌민)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려인삼이 베트남 독립영웅을 살려냈다는 사실은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려인삼이 어떤 경로로 베트남에 흘러 들어갔고,또한 어떻게 호찌민에게 전달되었는지 자료를 찾아 추적해 보았다. 

마딘떱이 호찌민에게 선물한 고려인삼 상자 ⓒ이원혁 제공
마딘떱이 호찌민에게 선물한 고려인삼 상자 ⓒ이원혁 제공


중국을 통해 고려인삼의 효능 베트남에 알려져

베트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끊임없는 침략과 함께 조공과 책봉의 역사를 이어왔다.중국을 통해 고려인삼의 효능이 베트남에 알려졌고,청나라 황제는 고려인삼을 베트남에 하사품으로 주기도 했다.19세기 베트남을 지배했던 응우옌 왕조의 민망황제는 고려인삼이 들어간 '민망탕'을 즐겨 마셨고,era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인삼을 선물했다고 한다.이러한 전통은 후대 황제들에게 이어져 반란을 진압하거나 프랑스군과 싸우러 가는 장군들에게 고려인삼이 하사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구한말 인삼상인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era멀리는 미주대륙에까지 진출한 기록이 있다.이들은 행상으로 번 돈을 독립자금으로 내거나 때로는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인삼이 거래되는 인삼상회는 행상들이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장소였고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도 수행했다.인삼상인들은 1900년대 초부터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에는 그 수가 200~300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베트남에서 활동한 인삼상인으로 기록이 전해지는 인물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전성화 선생이 거의 유일하다.3·1 운동에 가담해 구금되었던 그는 만주와 홍콩을 오가며 인삼행상을 하다가 1933년 베트남 하이퐁에 정착하여 고려물산상회라는 인삼 가게를 열었다.그의 아들 전영상이 남긴 수기에는 고려물산상회는 'casino 영화관' 맞은편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하지만 casino 영화관은 이미 오래 전에 문을 닫아 옛 장소를 찾기 힘들었다.며칠 동안 수소문한 끝에 '꽁년 영화관'으로 이름이 바뀐 사실을 알아내어 가게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려물산상회는 구도심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의 하나인 꺼우덧 거리에 있었다.전통적인 금은방 거리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인삼 가게가 있었을 것 같은 지역이다. 

1930년대 고려물산상회가 있던 하이퐁 구도심의 꺼우덧 거리 ⓒ이원혁
1930년대 고려물산상회가 있던 하이퐁 구도심의 꺼우덧 거리 ⓒ이원혁


우리 역사의 흔적을 쫒아가는 일은 힘든 작업이었지만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했다.전영상의 수기에 따르면 고려물산상회의 건물은 2층이었는데 1층 매장에서는 한국·중국·미국산 인삼을 판매했고 2층은 가족들이 살았다.전성화 선생은 인삼 가게를 운영하면서 자동차를 타고 두세 달씩 인삼을 팔러 베트남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하노이의 관문인 하이퐁에서는 고려물산상회를 중심으로 10여 명의 인삼상인들이 활동했는데 비교적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당시 부자들이 중병에 대비해 고려인삼을 사서 집에 보관해 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자연스럽게 인삼상인들은 지역 사회의 유력인사들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그 결과 호찌민이 위급했을 때 인삼의 덕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인삼상회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2층 건물.현재 카페로 사용 중이며 촬영은 하이퐁 한인교회 강훈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이원혁
고려인삼상회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2층 건물.현재 카페로 사용 중이며 촬영은 하이퐁 한인교회 강훈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이원혁


'호찌민 인삼',era양국의 독립운동에 서로 영향 주고받았을 수도

우리와 베트남의 직접적인 교류는 두 민족 모두 힘든 시기에 '인삼'이라는 의외의 보물을 통해 싹트기 시작해 호찌민을 살리는 뜻밖의 일을 빚어냈다.'호찌민 인삼' 사건은 개인의 건강 회복에 머물지 않고,era두 나라의 독립운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긴밀히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사학자 E.H.카는 "우연으로 취급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려인삼이 호찌민을 살려낸 일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그 시대를 힘겹게 살아간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우리와 베트남이 과거에 주고받은 역사적 연대감과 문화적 유산이 오늘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발전한 두 나라 관계의 주춧돌이 되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전 KBS 일요스페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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