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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첫 번째만 기억하고 두 번째부터는 그냥 잊어버리곤 한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압제로부터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투도 그렇다.1944년 6월6일 미국·영국·캐나다가 단행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일명‘디데이’(D-Day)로 불리며 2차대전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자리매김 했다. ‘지상 최대의 작전’부터 ‘라이언 일병 구하기’까지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가 됐다.그런데 디데이로부터 2개월여 지난 1944년 8월15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이뤄진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은 오늘날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사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후에도 프랑스 국토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내몰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프로방스에 상륙한 연합군에 맡겨진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저 ‘노르망디 상륙으로 프랑스가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짧은 한 문장만 입력돼 있다.
두 번째로 프로방스 상륙을 놓고 연합국 지도자들 간에 불거진 분열을 꼽을 수 있다.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프랑스 남부 상륙을 강력히 지지했다.노르망디에 상륙한 아군을 지원하면서 신속히 독일 본토로 진격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여겼다.이오시프 스탈린 소련(현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도 루스벨트와 의견을 같이했다.하지만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완강히 반대했다.그는 전후 소련이 동유럽을 자기네 세력권으로 만들 가능성을 우려했다.이를 막으려면 영·미 연합군을 동쪽으로 최대한 깊숙이 진출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다.그래서 지중해를 건넌 연합군이 프랑스 남부 말고 그 동쪽의 이탈리아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처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영국에서 프로방스 상륙작전의 의미가 평가절하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이는 자연스럽게 미국과 소련에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