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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팔레트와 붓을 든 자화상,1665년경,영국 런던 켄우드 하우스20대 중반에 스타로 떠오른 화가가 있습니다.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다 누린 그는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주문이 밀려들었고,그에게 그림을 배우겠다며 학생들이 찾아왔죠.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그림 주문도 줄어듭니다.집을‘영끌’해서 샀는데,커져 버린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파산 신청까지 합니다.화단의 중심에 있다가 가장자리로 밀려났고,사람들로부터 잊힌 신세가 됩니다.네덜란드의 대표 화가 렘브란트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렘브란트는 외톨이가 되면서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인기도,명성도 모두 잃은 시기에 그가 그린 작품들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오늘의 주제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한 렘브란트입니다.
탄탄대로였던 젊은 시절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방앗간 집 여덟째로 태어났습니다.부유한 부모 덕분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당대 명문으로 꼽히던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하지만 학과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그림을 시작합니다.도제 생활을 마치고 주목받는 신예 화가가 됩니다.당시 네덜란드에선 초상화가 유행했습니다.특히 전통적인 종교화보다 초상화가 더 많았는데요.네덜란드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프로테스탄트(신교)가 허용되던 시기였죠.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네덜란드인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여러 명이 동시에 나오는 집단 초상화를 주문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주문자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했습니다.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덕목은 근면과 성실,절약이죠.그런데 초상화 주문자들은 자신들이 검소하면서도 부티 나는 모습을 원했다고 해요.렘브란트는 이들의 검정색 옷차림 속 포인트가 되는 레이스와 액세서리를 화려하고 세밀하게 묘사했죠.또 지성과 학식을 잘 표현했습니다.
젊은 화가의 자화상
렘브란트가 성공한 과정은 젊은 시절의 자화상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렘브란트는 성공한 후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해요.그림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값비싼 그림과 골동품,비단,박제된 동물 등을 마구 사들였죠.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 암스테르담에 있는 호화 주택을‘영끌’해서 사기도 했습니다.이 집은 당시 네덜란드 평균 집값의 10배가 넘었는데,렘브란트는 집값의 75%를 대출받았죠.렘브란트는 어차피 그림 주문이 밀려들고 있었고,수입이 많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렘브란트의 처가 식구들은 그가 아내의 재산을 탕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한순간에 꼬여버린 인생
잘 풀리기만 했던 렘브란트의 인생에 불행이 연달아 발생합니다.렘브란트와 사스키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총 네 명인데요.이 중 셋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습니다.1642년에는 사스키아까지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같은 해 렘브란트가 그린 그의 대표작‘야경’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을 어려움으로 빠뜨렸습니다.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민병대원들이 이 그림을 주문했죠.그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신들의 멋진 모습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습니다.당시 집단 초상화는 돈을 낸 만큼 골고루 주문자들을 잘 그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습니다.그래서 당시 전통적인 집단 초상화를 보면 단체 사진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납니다.
하지만 초상화를 주문한 당사자들은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그들이 원한 건 집단 초상화 그 이상도,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앞줄 가운데 대장은 크게 그려져 있는데,뒤에 사람들은 작게 그려져 잘 안 보입니다.어떤 사람은 눈만 보이죠.주문자가 아닌 인물까지 등장합니다.어린 소녀가 병사들 사이에 슬그머니 들어가 있습니다.
초상화 주문자들은 엄숙하고 지적으로 보이고 싶었는데,자신들이 어수선해 보여 위신이 손상됐다고 판단했습니다.주문자들은 이 그림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렘브란트는 헨드리케와 새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죽은 아내인 사스키아는 렘브란트가 재혼할 경우 그에게 남긴 유산을 무효로 한다는 유언을 남겼거든요.안 그래도 빚에 쪼들리던 렘브란트는 재혼하면 파산하는 셈이었죠.
렘브란트와 헨드리케는 사실상 명백한 부부였습니다.하지만‘혼인’이라는 틀로만 부부 관계를 규정했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의 동거를 비난했습니다.1654년 헨드리케는 부정행위로 교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됩니다.
‘야경’작품이 거절당하고,헨드리케와의 스캔들까지 생기자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이들은 점점 줄었습니다.
빚에 시달리던 1656년 렘브란트는 결국 파산 신청을 합니다.그가 수집한 물건들도 경매에 부쳐졌습니다.렘브란트는 1658년 암스테르담 도심 서쪽 요르단 지구의 초라한 집으로 이사하면서 암스테르담의 경제·문화 중심지에서 멀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혔지만,자유를 얻다
역설적이게도 렘브란트는 가난과 함께 자유를 얻었습니다.명예와 허영 대신 자신이 원하던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됐습니다.렘브란트는 “내 영혼을 한없이 펼치고 싶을 때 나는 명예가 아닌 자유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렘브란트는 대담하게 전통을 파괴했습니다.또 빛을 제한적으로 사용해 인물의 내면에 집중했습니다.사랑하는 가족
불행하게도 렘브란트는 또 상실을 겪습니다.1663년 헨드리케가,1668년 티투스가 차례로 죽었습니다.
말년의 자화상
이 그림 속 렘브란트는 웃고 있습니다.삶의 풍파를 다 겪고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모습입니다.죽음을 앞둔 제욱시스처럼 관람자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
그림 속에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두 팔로 감싸 안아주고 있습니다.아들의 발바닥은 상처투성이입니다.아들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아버지의 가슴에 묻고 있습니다.아버지의 꼭 다문 입술은 무언의 용서를 의미합니다.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통해 젊은 시절 자신의 방탕한 삶에 대해 참회하고‘이제는 괜찮다’며 자기 자신을 용서했을지도 모릅니다.
렘브란트는 상류 사회에서 밀려나 외톨이가 됐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습니다.고난 속에서 끝없이 성찰했습니다.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평온하고,자애롭고,용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의 말년 자화상에선 오히려 품위가 느껴집니다.외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내적으로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것이죠.렘브란트가 마음을 다해 그린 그림은 큰 울림을 줍니다.
<참고자료>
-EBS,클래스ⓔ 안현배의‘빛과 어둠의 화가.렘브란트’
-파스칼 보나푸(2009),렘브란트 :빛과 혼의 화가,시공사
-로베르트 다다 외(2008),렘브란트,예경
-발터 니그(2008),렘브란트 : 영원의 화가,분도출판사
-드 브리스(2005),렘브란트,한명
-마리에트 베스테르만(2002),렘브란트,한길아트
-피에르 카반느(1994),Rembrandt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열화당
-루드비히 뮌츠·밥 하크(1991),렘브란트 하르멘스 반 라인,중앙일보사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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