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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 상설 전시관을 다녀와서【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이다."
소설가 박경리가 천경자 화백을 표현한 문장이다.자기 작품에 있어 고약하리만치 완벽을 추구했던 예술가 천경자의 성품과 고독이 집약된 명문이다.
1998년 천경자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고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그의 상설전시실이 개관했다.말 그대로 상설 전시기 때문에 아무 때나 가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다.
2024년,천경자 탄생백주년을 맞아 <천경자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가 열리고 있다(2024년 8월 6일부터 계속).전시 제목은 그가 쓴 수필 제목이기도 한데,그는 그림뿐 아니라 글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무려 18권의 책을 썼다.
천경자와 뱀의 인연
천경자(1924~2015)는 산과 강과 바다가 사계절 남다른 절경을 뽐내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지천으로 깔린 천연색 꽃들과 생명체들은 어린 천경자의 눈을 통과해 그대로 가슴에 새겨졌다.어떤 미술 수업으로도 배울 수 없는 색채와 감성을 자연에서 흡수한 것이다.몸으로 흡수된 날것의 감각들은 훗날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천경자의 부친은 군청 관리였고,킹덤 슬롯모친은 높은 벼슬을 지냈던 집안의 외동딸로 동양화와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광주 공립 보통 여자학교(지금의 전남여고)에 남아있는 그의 성적표 비고란이 흥미롭다."회화에 능하고 골계미가 있음." 그림뿐 아니라 해학과 풍자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졸업반이 된 천경자는 일본 유학을 꿈꾸며 담임에게 동경미술대학 입학원서를 부탁했다.일본인 담임은 조선인이 무슨 일본 유학이냐며 모욕적인 언행을 퍼부으며 수차례 뺨까지 후려쳤다.그는 이런 모욕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다행히 당시 도화 선생님이었던 김임년의 적극적인 지지로 간신히 입학원서를 쓸 수 있었다.
1941년,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동양화과(당시 일본에선 일본화라고 부름)에 입학한 천경자는 1년 먼저 입학한 박래현을 만나는데,훗날 두 사람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양화가가 된다.
이즈음 외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이 마비되었고 부친이 마작으로 전답을 다 날리는 바람에 집안이 폭삭 주저앉아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나마 모친이 가지고 있던 패물을 팔아 겨우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그러기에 하루라도 빨리 화가의 길에 들어서야 했다.
천경자는 당장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준비한다.1943년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조부'로 입선한 그는 다음 해에 외할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 '노부'로 연속해서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외할아버지는 담뱃대를 무릎에 올리고 방석에 앉아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에서 가부장적 위엄이 드러남에 반해 외할머니는 담뱃대를 옆으로 물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조부'에 비해 훨씬 더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하고 있지만,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건 오히려 노부 쪽으로 기품과 위엄이 묻어난다.
1944년,천경자는 일본에서 만난 유학생 이철식과 결혼하고 다음 해 귀국해 모교였던 전남여고 미술 교사로 취직한다.틈틈이 그림을 그려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그림을 팔았지만,(당시 그림값이 지금과 같지 않았기에) 기울어진 가세를 혼자 책임지긴 역부족이었다.남편은 경제력이 없었고 조부모에서 부모,그사이 태어난 천경자의 자녀 둘까지 오직 그의 수입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가운데 설상가상 천경자가 가장 의지했던 여동생이 결핵에 걸려 사망한다.치료만 받았으면 살릴 수도 있었는데,스트렙토마이신 살 돈이 없어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봐야 했다.천경자는 끝도 없이 절망했다(결국 그는 첫 남편과 정리한다).
그는 살기 위해 이전에 그렸던 그림과는 다른,삶의 동력이 되는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그렇게 헤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뜻밖에 뱀이었다.왜 하필 뱀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런 마당에 내가 어찌 향기 나는 백합을 그릴 수 있었겠느냐."
서른다섯 마리의 뱀들이 우글우글 모여 꿈틀거리고 있다.금방이라도 지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이 작품의 제목은 '생태'이다.살고자 몸부림치는 뱀을 화폭 가득 담아가며 삶에 대한 욕망을 재충전했다.가난으로부터,가족을 잃은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살아낼 힘을 뱀을 그리면서 길어 올린 것이다(이후 그는 위기 때마다 뱀을 그려 탈출했다).
당시 부산 남포동 일대 다방들은 피난으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아지트이자 전시장 역할을 했는데,1952년 칠성 다방에서 '대한미협전'이 열렸다.천경자는 이 그림을 포함해 총 3점을 출품했다.하지만 주최 측으로부터 너무 기괴하다는 이유로 '생태'는 거부당한다.
결국 이 그림은 전시장이 아닌 다방 주방에 보관하게 되는데,아이러니하게도 이 기괴한 그림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주방으로 몰려들었다.여자(천경자)가 주머니에 뱀을 넣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이 작품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고 더 많은 사람이 뱀을 보러오면서 전시는 흥행을 이룬다.
전시에서 그림을 팔아 얼마의 돈을 쥔 그는 광주로 돌아와 폐가나 다름없는 집을 샀다.이 무렵 그는 두 번째 사랑에 빠지는데,하필 그는 유부남이었다.두 집 살림하는 그 남자 김남중을 머리로는 떠나보내야 했지만,가슴은 그러지 못했다.이때 부산에서 천경자의 전시를 눈여겨 본 김환기가 서울에서 연락해 왔다.김환기는 홍익대에 재직하고 있었는데,학교에 공석이던 동양 채색 화가로 천경자를 추천한 거다.
1954년,천경자는 서울로 향했다.홍익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그러는 동안 김남중과 사이에서 딸과 아들이 태어났다.그때 월세 살던 방이 자기도 모르게 팔리는 바람에 보증금도 못 찾고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가 되었다.빨리 집을 비우라는 집주인의 요청에 막막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작품을 그리는데.
그 그림이 바로 큰딸을 모델로 한 작품 '정(靜)'이다.아무렇게나 꺾이고 구부러진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단발머리 소녀가 해바라기를 깔고 앉아 있다.소녀 품에 안긴 고양이는 앞발을 빼고 정면을 응시하고,소녀는 긴장한 얼굴로 옆을 바라본다.화면을 지배하는 붉은 색조와 긴장한 듯한 소녀의 표정은 보는 이의 불안감을 고조시킨다.이런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듯 소녀의 발밑에는 꽃 세 송이가 놓여 있다.
이 작품을 '조선미협전'에 낸 천경자는 며칠 후에 전시장을 찾고 오열했다.궁지에 내몰린 상태에서 완성한 이 작품이 대통령상을 받은 거다.궁하면 통한다더니 그는 상금과 그림판 돈을 합쳐 간신히 이사 갈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기행 회화의 탄생
당시 동양화라 하면 수묵화가 대세였고,채색화는 일본화로 매도 당해 입지가 좁았다.생계를 위해 수묵화로 전향하는 채색 화가들도 있었지만,무엇보다도 다채로운 색을 사랑했던 천경자는 그럴 수 없었다.
55년도에 수필집 <여인 소묘>을 발표한 그는 문학가들과 친밀했는데,특히 박경리와 친해 박경리가 동아일보에 <파시>를 연재할 때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그에게 60년대는 비교적 안온한 시기였다.하지만 그에게 안온함은 오히려 우울함을 가져왔다.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교수직을 내려놓고 세계여행을 떠났다.30여 년에 걸쳐 미국,유럽,아프리카,카리브해 등을 떠돌며 작업에 몰두했다.역시나 새로운 환경은 그의 창작 욕구를 자극했고 기행 회화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 그림은 시립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자마이카의 고약한 여인>이다.원색의 색감은 평화로운 동화 같은데 제목이 상상을 자극한다.저 여인이 대체 어쨌기에 고약한 여인이 됐을까?당나귀한테 고약하게 굴었을까?혹시 저 여인이 너무 순순해서 그의 고약한 마음이 비쳐 보였던 건 아닐까?박경리 눈에 비쳤던 그의 모습처럼.
이국적인 풍광이 펼쳐지는 이 그림은 색을 켜켜이 쌓아 올려 공간감을 만들었다.그는 색이 마르면 덧칠하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기에 작품의 제작 기간이 길었다.작은 작품이라도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려 완성했기에 그가 그의 작품을 못 알아보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유명한 미인도 위작 사건이 터졌다.당사자인 그가 "미인도는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국립현대미술관과 검찰은 진품이라고 발표했다.당사가 아니라는데 왜 그 그림이 진품이어야만 했을까?한 예술가를 자기 작품도 못 알아보는 치매로 몰고가 결국 절필 선언까지 만든 사건을 두고 그의 딸은 <천경자 코드>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미인도 위작 사건은 이미 많은 기사와 관련 다큐가 많기에 따로 언급하진 않겠다).
"혹시라도 엄마가 여성이라서 좀 밟아도 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1995년 회고전에 몰린 인파
절필은 선언했지만,뼛속까지 화가인 그가 어찌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그의 대대적인 회고전이 열렸고,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인파가 몰려들었다.한 달 새 8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고 폐막식 날엔 너무 많은 사람으로 인해 산소부족이 발생,포커 머신 게임 무료 슬롯한 사람이 쓰러지는 일까지 발생했다(다행히 금방 깨어났다).
전시와 동시에 그는 <천경자 화집>과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을 출간했다.당시 71세였던 천경자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문학을 오가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으며 명실상부 대한민국 예술계의 가장 핫한 셀럽이었다.
위 그림은 호암미술관에 전시했던 작품 <황혼의 통곡>인데 완성도가 마음에 차지 않았던 천경자는 주최 측의 강한 권유에 전시에 내긴 했지만(좌측 그림),사인을 하지 않았고,온라인 카지노 먹튀 베스트 온라인 카지노슬롯검증사이트1998년 시립미술관 기증할 땐(우측 그림) 공중에 낙타가 지워지는 등 약간의 수정을 했다.이런 이유로 그때의 작품과 지금 보는 작품엔 다소 차이가 있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그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2015년 8월 뉴욕에서 눈을 감았다.뒤늦게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해 10월 30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의 추도식이 열렸다.
다이돌핀은 신경전달 물질로 주로 감동받을 때 나오는데,이 호르몬이 분비되면 강력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어떤 자극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면 서울시립 미술관으로 가시길 추천한다.그의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느끼고 감탄하면서 몸 안에 말라버린 다이돌핀이 다시 샘솟게 되길.그로 인해 얻은 기쁨이 고된 삶을 살아가는데 잠시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이 글은 책 '천경자 평전 찬란한 고독,한의 미학'과 '천경자 코드'를 참고해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