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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를 뚫고 천태산에 오르고 있는 8살 아이 서진이.박준형 제공 흰 눈이 나부끼는 날이었다.지난해 12월21일,성탄절을 나흘 앞둔 토요일 정오 느지막이 집을 나선 나와 아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따라 부르며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옥천톨게이트로 들어섰을 때쯤 눈발이 한층 굵어졌다.“와,눈이 펑펑 온다!오늘은 하얀 눈 위에 텐트 칠 수 있겠어!” 차창 밖을 바라보는 아들의 상기된 표정이 보였다.목적지는 충북 설악으로 알려진 천태산(714.7m).지난 방장산 등반 이후 1년 만에 하는 설산 산행이었다.혹시 빠뜨린 건 없는지 불안해졌다.눈길 등산을 위한 아이젠과 스패츠,방한을 위한 우모복과 부티(발을 따듯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덧신),겨울용 침낭과 매트 등 야영 장비부터 여벌 장갑까지 확인했다.소복이 쌓인 눈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 때문에 장갑은 금세 젖을 수 있으므로,여벌 장갑은 쉽게 꺼낼 수 있는 곳에 준비했다.

천태산의 등산 코스.성기령 기자 오후 2시,4you casino충북 영동군 양산면의 영국사 주차장에 도착했다.방수 기능의 재킷과 등산화를 착용하고,등산스틱을 펼쳐 든 우리는 휴대전화에서 지도 앱을 열어 탐방로를 확인했다.천태산 정상으로 오르는 세 갈래 길이 화면에 나타났다.“우리는 어디로 올라갈 거야?” 아들의 물음에 난 손끝으로 지도의 등고선을 가로지르는 실선(등산로)을 반시계방향으로 따라 그리며 답했다.“에이(A) 코스로 정상에 올라가서 디(D) 코스로 하산할 계획이야.” 에이 코스는 암릉을 거쳐 정상으로 향하는 최단거리 등산로,디 코스는 주 능선을 타고 남고개를 거쳐 내려오는 길로 시원한 조망이 일품이다.비(B) 코스는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되었고,시(C) 코스는 디 코스에 견줘 거리는 짧지만 전망이 밋밋하다.“정상으로 향하는 에이 코스에는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암벽 구간이 다섯곳 있어.이 구간을 지날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해!” 나의 염려에 8살 아들 서진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천태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하룻밤 보금자리.박준형 제공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소리 내어 운다는 영국사 은행나무를 지나 목조계단을 오르며 산행은 시작됐다.입산한 지 10분 만에 마주한 첫번째 암벽은 오르기 비교적 수월했다.아들은 로프를 잡고 첫발을 내딛던 순간엔 긴장감이 역력했지만,첫 암벽 구간을 가볍게 통과한 순간엔 표정에 옅은 자신감이 피어올랐다.첫번째보다 조금 더 긴 암릉이 펼쳐진 두번째 구간과,레알 마드리드 토토더 길고 가파른 세번째 암벽 구간을 차례대로 통과했다.네번째는 아찔한 난도의 절벽 구간이었다.75m의 직벽 앞에 선 우리는 주저 없이 안전한 우회로를 선택했다.좌우가 탁 트인 능선 위에 오를 무렵 갑자기 맵찬 설한풍이 불어닥쳤다.나와 아들은 자세를 낮추고 눈보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다섯번째 로프 구간을 통과하자 눈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새하얀 등산로가 펼쳐졌다.눈밭을 사푼사푼 거닐던 아들이 고개를 들었다.“아빠,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참 좋다!”

천태산 디(D) 코스에 오르면 보이는 풍광.박준형 제공 오후 3시50분,천태산 정상에 도착했다.“궂은 날씨에도 대단하다!몇살이야?” “겨울 산을 오르는 아빠와 아들이라니,너무 부러운데요?” 경기도 남양주에서 왔다는 중년 부부가 인사를 건넸다.“한때는 아이들과 하는 등산이 우리 부부의 로망이었어요.하지만 그때는 삶이 너무 바빴고,시간이 흘러 실행에 옮길 여유가 생기니 아이들은 부모 따라다닐 나이를 지났더라고요.” 자녀가 청소년기에 접어들 무렵 100대 명산을 목표로 시작한 산행이 어느덧 3년째라는 부부는 이번 천태산을 끝으로 100번째 산을 모두 완등했다며 소회를 밝혔다.“100개 산을 모두 오르고 나니 아쉬움이 들어요.자연과 함께 쉼을 가지려 시작한 등산인데,언제부턴가 숙제하듯 정상 인증에만 급급했어요.그래서 다가오는 봄부터는 그동안 다녀왔던 산 중 기억에 남는 산부터 다시 가보려 합니다.천천히 자연을 즐기려고요.” 부부는 서진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만난 꼬마 이야기를 해주면서,우리 집 아이들에게도 다시 권해봐야겠어요.이듬해엔 저도 아이들과 같이 걷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태산 정상에 오른 서진이.박준형 제공 문득,우리 아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함께 걸어온 수많은 추억이 뇌리를 스쳤다.때론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그런데도 아이와 함께하는 산행은 늘 가슴 따듯한 보람으로 다가왔다‘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 때문은 아니었다.부자가 함께 땀을 흘리며 주고받는 호흡과 아이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성장해왔다.

“아빠!거기는 우리가 올라왔던 에이 코스야!디 코스는 이쪽으로 가야 돼!” 상념에 잠겨 걸음을 옮기던 나는 아들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얼마 전까지도‘언제 도착해’를 연발하며 뒤따라오던 아들이 어느새 나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흐뭇했다.우리는 지난 한 주의 일상을 재잘재잘 곱씹으며 하룻밤 머무를 박지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글·사진 박준형‘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