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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 거주했던 일본인들‘영암회’조직
1984년에 사진·회고록 담은‘추억의 영암’발간
“패망 후 태극기들고 만세 불렀다” 증언도
일제는 1937년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쟁 물자를 공출했다.1945년 영암지역에서 모은 놋쇠 등 금속을 모아두고 일본인들이 기념사지진을 찍었다‘추억의 영암’캡쳐.“어느덧 세월이 흘러 패전과 귀환으로부터 벌써 40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영암이 생각납니다.”
1984년 일본에서 발간된 한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책 제목은 <추억의 영암>‘피와 땀과 눈물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책은 일제강점기 전남 영암에 거주했던 일본사람들이 만든‘일본 영암회’에서 발간했다.
일제때 영암에는 1000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했다.대부분 지배층이었다.영암회 명단을 보면 경찰서장,학교 교장과 교직원,군청 고위 공무원,우편국장,
라인 블록 체인금융조합 임원 등으로 일했다.주조업,건축업,여관업,상업,정미소,
카지노 팁미곡상,자전거판매점,고리대금업 등을 운영했고 지주도 많았다.
태평양전쟁 패배로 일본으로 되돌아간 이들은‘식민지 한국’에서의 생활을 잊지 못했다.영암회가 만들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1961년 벳푸 온천에서 첫 모임을 연‘영암회’는 20여 년 뒤 한국에서의 사진과 추억을 모아 300쪽에 이르는 책을 발간했다.
<추억의 영암>은 재일동포 사업가 하정웅씨가 수집해 영암에 기증한 미술작품과 도서에 포함됐다.기증 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해 설립된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이 2017년 한국어로 번역했다.
일제강점기 전남 영암에 살다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1984년 출간한‘추억의 영암’책.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제공.경향신문은 106주년 3·1절을 맞아 <추억의 영암>을 입수,일본인들이‘일제강점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책에는 전국적인 3·1 만세운동에 큰 위기를 느낀 일본인들은 일본군이 투입될 때까지 직접 총을 들고 한국인들을 경계했다고 적혀있다.
1919년 영암에 살았던 요시타케 다케오는 3·1운동 당시 상황을 “3월 조선 전역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으로 재류 일본인은 모두 옛 성문터(영암읍성 추정)에 진을 쳤다.총을 들고 밤낮으로 경계를 선 것이 열흘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일본인들이 안심한 것은 일본군이 투입된 이후였다.다케오는 “다카다 13사단 보병 1개 중대가 지원하러 와서 (일본인들이)안심한 것은 4월 초였던 듯하다”고 밝혔다.
일본군이 3·1운동 진압을 위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어린 일본 학생을 동원했다는 증언도 있다.10살때 영암 구림면에 살았던 모가리 아키라는 “잊지 못할 사건 중 하나는 1919년 독립운동이었다.어느 비 오는 날 수비대가 찾아와 조선어를 할 수 있으니까 길 안내 겸 통역으로 끌고 갔다”고 회고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전남 영암의 한 학교 졸업사진.교사는 일본도를 들었고 학생들은 모두 일본식 옷을 입었다‘추억의 영암’발췌.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어떻게 착취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있다.1934년부터 영암 등에서 11년간 교사로 근무했던 나카노 미노루는 “성공해 부자가 된 사람들의 직업 대부분은 겉으로는 농업·상업·공업이었지만 뒤로는 고리대금으로 토지의 유력자(지주)가 되었다”고 적었다.
수법도 적혀있다.한 일본인 비료업자는 아버지 장례를 위해 돈을 빌린 (한국인)남자가 약속한 날 돈을 갚으러 오자 일부러 외출해 받지 않은 뒤‘약속이 다르다’며 담보로 삼은 토지를 힘으로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1938년 일제가‘국가총동원령’을 내렸을 당시 상황도 나온다.1918년부터 한국에 살았던 도오이케 마쓰오는 1941년에 대해 “아이들도 어른처럼 군마용 꼴 베기,
마작 일본어로송근유 작업 혹은 면화 채집 등을 했다.금속공출에 따른 금반지 등 귀금속 공출도 극심했다”고 했다.<추억의 영암>에는 1945년 한국인들로 부터 수거한 놋쇠 그릇 등을 쌓아두고 일본인들이 찍은 기념사진이 실려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인들은 패전을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한 일본인은 “여름 폭염과 함께 적기가 내습했을 때‘일본도 이제 끝인가’하는 비참한 직감이 스쳤다”고 했다.또다른 사람은 “일본의 정세가 불리해 목포 보리사에 안치했던 부모님 유골을 미리 집으로 가져왔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10월 전남 영암군 영암읍에서 열린 가울 축제.한국의 읍내였지만 참가자들이 모두 일본식 복장을 하고 있어서 일본처럼 보인다‘추억의 영암’발췌.패망 이후 일본인들이 태극기를 만들어‘만세’를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마쓰오는 “패전후 16일 경 낯설고 작은 깃발을 치켜들고 (일본인들이)만세!만세!하는 외침이 온 읍내에 넘쳐났다”면서 “일장기와 비슷한 태극기,어느새 만들었을까.어린아이까지 한 사람도 일본어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그 짧은 시간에 태극기를 갖추는 준비성과 철저함에는 그저 공포를 느낄 뿐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패망 이후 장흥에서 180명이 배를 타고 출항해 일본으로 돌아가다 대한해협에서‘기뢰’폭발로 침몰해 20여 명이 겨우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당시 침몰한 배에서 일본인 20명을 구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한국 선박인‘경상남도 송도호’선장과 선원들이었다고 한다.
<추억의 영암>에는 일본의 행태를 반성하는 사람들도 있다.교사 였던 미노루는 “조선에 살던 시절 식민정책의 일익을 담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오늘날에도 그것을 지속하려는 일본인이란 무엇일까?나는 부끄러움에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은 “광복 40년이 지난 시점에 기록해 일부 불명확한 기록이 포함됐을 수도 있지만 기록물로서 가치가 크다고 본다”면서 “일제강점기 한국 거주 일본인들의 생활과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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