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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68]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이건 아주 짧은 이야기다.손바닥만 한 판형에 위아래로 충분한 여백을 둔 책장이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다.작정하고 읽는다면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채 한 바퀴 돌기 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정도다.어쩌면 그만큼도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겠다.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 이야기다.

담긴 내용도 별다를 것 없다.한 소녀가 부모의 사정으로 잠시 먼 친척 부부의 집에 맡겨졌다 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단 며칠 동안의 이야기가 전부다.맡겨지기 전에도,이후에도 소녀는 소녀일 뿐이다.특별한 사건,이를테면 범죄에 연루되거나 마을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소녀는 때가 되어 저를 맡아준 부부의 집에서 제 집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흔히 소설이란 누가 보아도 눈에 띄는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고 여긴다.열렬한 사랑과 절절한 이별은 소설이 되지만 텅 빈 마음으로 하는 연애는 그렇지 못하단 식이다.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은 소설의 흔한 소재이지만 병원에 입원해 그가 낫는 모양은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다.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끝까지 읽어내도록 할 수 있는 흡인력 있는 이야기가 소설이 될 자격이 있다는 얘기다.

▲ 맡겨진 소녀 책 표지 ⓒ 다산책방
특별할 것 없는 며칠,모든 것이 변한다

클레어 키건이 이 소설에서 맞서는 게 바로 이와 같은 고정관념일 테다.대단한 사건 하나 없는 며칠의 일상이 어쩌면 삶 전체를 바꾸는 소중한 무엇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 작품이 증명한다.<맡겨진 소녀> 속을 흐르는 정서가,작가가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는 시선이,그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관계가 독자에게 특별한 감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설의 첫 장에서 소녀는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엄마의 고향마을로 간다.집안일에다 밭일에다 몸 하나로 부족한 엄마는 조만간 다섯째 동생을 낳을 것이다.아빠가 소녀를 다른 마을로 데려가는 게 그 때문이란 걸 소녀는 안다.킨셀라 아주머니와 존 아저씨의 집에서 한동안 지내게 된다는 것도.

출발 전 소녀는 아빠가 엄마에게 '얼마 동안 맡아달라고 하지?' 하고 묻던 이야기를 들었다.엄마는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하고 답했다.아저씨와 아줌마가 원하는 만큼 소녀는 떠나 있게 될 것이다.

아저씨는 나를 트랙터에 태우고 시내로 가서 레드 레모네이드와 감자칩을 사주겠지.아니면 나더러 헛간을 청소하고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돼지풀과 소루쟁이를 뽑으라고 시킬지도 모른다.아저씨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는 걸 보고 나는 50펜스 동전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니 손수건일 거다.두 사람의 집은 낡은 농장 가옥일까 아니면 새로 지은 단층집일까,화장실은 밖에 있을까 아니면 변기도 있고 수돗물도 나오는 실내 화장실일까 궁금하다.나는 캄캄한 침실에서 다른 여자애들이랑 같이 누워 아침이 오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 이야기를 나누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10,11p
달리는 차 안에서 소녀는 어린애다운 상상으로 제가 맡겨질 곳을 그려본다.그 상상은 정말이지 대중없는 것이어서 이렇거나 저렇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제멋대로다.부모는 딸에게 제게 있을 곳이 어떠한지를 말해주지 않았고,한국 싱가포르 토토소녀는 제 삶에 적응해온 나름의 방식대로 애써 기대하지 않으며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실망하지 않기 위하여 기대하지도 않는,그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상상하는 아이의 마음이 짤막한 문장 가운데 절묘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 새로운 곳에서 뜨거우면서도 차가운,겪어본 적 있는 기분을 느끼며 잠에서 깬다.킨셀라 아주머니는 나중에 침대 시트를 벗길 때에야 알아차린다.(중략) 지금 당장 말하고 싶다.솔직히 말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으로 끝내고 싶다.- 35,36p
긴장한 탓일까.낯선 집에서 첫 밤을 보내고 깨어난 아이는 제가 자리에 실수를 했단 걸 깨닫는다.클레어 키건의 장기,짧은 묘사와 표현만으로 인물의 성격과 그가 겪어온 일을 짐작케 하는 솜씨가 여실히 드러난다.

오줌을 싼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제게 닥칠 화를 가장 적게 하는 것이라 여기는 아이,소녀가 제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를 독자는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앞서 소녀를 데려다준 아버지,또 잠깐씩 소녀가 떠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남긴 강렬한 인상처럼.

맡겨진 집에서 처음 마주한 중요한 사건은 소녀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흘러간다.아주머니는 소녀가 벌인 일을 알아채지 못한 양 '매트리스에 습기가 찼다'고 말한다.소녀의 잘못이 아니라 습기 찬 방이 문제라고,그리하여 못쓰게 된 매트리스를 빨래할 일이 생겼다고 한다.

소녀는 아주머니와 함께 매트리스를 문질러 씻고 햇볕에 말린다.함께 고생하고 고생했으니 베이컨을 굽고 파를 뽑아 와서는 둘이 함께 먹는다.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하루,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소녀가 겪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이 담담한 문장으로 펼쳐진다.

너무 좋아서 차라리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소소한 일상의 연속처럼 보이는 이야기는 차츰 제 모양을 드러낸다.소녀는 언제고 끝날 것이 확실한,그러나 평안하고 행복한 삶에 적응한다.그간 수없이 꺾여나간 기대 탓으로 제 나이보다 웃자라버린 소녀다.제가 가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법을,그리하여 기대를 갖지 않는데 익숙한 소녀다.

그런 삶을 겪은 이는 만족스런 것을 불안해하고 불만족스런 것을 자연스레 여기는 법이다.좋은 것이란 마침내 끝나버릴 것이고 좋으면 좋을수록 고통 또한 클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소녀가 킨셀라 아주머니,존 아저씨와 함께 보내는 일상이 차라리 어서 끝나버리기를 바라는 것도 그래서다.클레어 키건은 사려 깊은 독자라면 그와 같은 마음을 짐작할 밖에 없는 꼭 그 만큼의 섬세함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주머니의 곁에서 요리와 빨래,게임청소를 돕고,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들판을 가로질러 달음박질 하는 나날이다.평안이란 단어를 가리키는 풍경이 있다면 꼭 소녀와 아주머니,아저씨가 보내는 일상이 아닐까 싶어지는 모습이다.그러나 소설 가운데 평안을 깨뜨리는 장면이 없지 않아서,소녀와 아저씨,바카라 네츄럴아주머니가 듣지 않았어도 될 말을 듣는 모습을 독자는 마침내 마주하고 만다.

그러나 삶이란 오묘하여 불행이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 되고,고통이 평안에 닿는 비결이 되기도 하다.발화되지 않아도 될 말이 소녀를 거쳐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 닿는 동안 소녀는 두 사람을 전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이해는 다시 두 사람의 관계를 다른 무엇으로 이끈다.

클레어 키건은 특유의 숙고 끝에 눌러쓴 듯한 문장으로 삶 가운데 흔치 않은 변화의 순간을 포착해 그려낸다.눌려 있던 감정이 둑을 넘쳐 흐르고 가물었던 대지가 마땅한 은총을 받는 순간을 어떠한 신성도 없는 기적처럼 묘사한다.그녀의 또 다른 작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또한 그러했듯(관련 기사: 아름답지 않은 곳에서도 아름다움은 태어난다).

넘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선이 깨어지고 피어나지 않을 듯 했던 꽃이 피어나는 순간,그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말하자면 <맡겨진 소녀>는 들꽃 한 송이 안에 깃든 기적을 내보인다.그로써 들판에 널린 꽃을,들판을,온 세상을 다시 보도록 한다.문학이 이룰 수 있는 아름다움이란 또한 이런 것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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