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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잠긴 이주민 거주지역
중국동포타운이 조성된 일대는 대부분 중국어 간판이었지만‘OO인력‘OO용역’등 한국어로 쓰인 인력파견업체들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한 업체 앞에서 만난 중국인 노동자 강모(34)씨는 “아이가 있는 엄마도 있었을 텐데 다들 타국에서 돈을 벌며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갈 생각에 힘들어도 참고 일했을 것 아니냐”며 한숨지었다.
음식점,대구 fc 대 fc 서울 통계환전소,마트 등 동네 곳곳에서는 이웃 주민이었던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 참사를 안타까워했다.동네 주민 장모씨는 “막역한 친구의 조카가 화재 당시 그 공장에서 일하다 추락해서 지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전했다.10년 전쯤 한국에 와 귀화한 김홍옥(44)씨는 “열악한 일터에서 일하는 중국 동포들의 환경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희생자 신원 확인이나 유가족 지원 등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들도 있다.이주민단체 대표들은 전날 경기 안산시 단원구 안산이주민센터에 모여‘화성공장화재 이주민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다.33년 전 귀화한 염모(75)씨가 “우리 동포들이 다 죽었네”라고 하자 정노아 목사는 “이런 큰 사고가 날 때면 소외된 외국인들이 큰 피해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이들은 분향소 설치,유품 정리,대구 fc 대 fc 서울 통계유가족 연락 등을 도울 예정이다.
참사 사흘째인 이날도 시신의 신원 확인이 이뤄지지 않아 유가족들은 장례식장·피해자지원센터 등을 떠돌았다.인천에서 일을 하다 조카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A씨는 슬리퍼를 신은 채 일하던 복장 그대로 지원센터를 찾았다.A씨는 “쌍둥이 누나의 외동아들과 딸이었다”며 “설마 우리 가족이 사망자 명단에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전날 늦은 밤 지원센터에서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밥숟가락을 제대로 뜨는 유가족은 없었다.참사로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한 유가족은 “애들이 다 없어졌다.우리 조카들 이제 29살인데”라며 함께 온 가족 품에 주저앉듯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