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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특집 일본 교토 답사기] ①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의 귀무덤제106주년 삼일절을 앞두고 지난 2월 20일부터 2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교토를 찾았다.교토에는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적이 많지는 않은 편이다.그러나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로 인해 고통 받아야만 했던 한국인들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삼일절을 맞아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번 환기하는 차원에서 해당 장소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기자말>
7년 만에 일본을 다시 찾았다.
일본 여행은 2018년 여름,카지노 검증 사이트 비 타임 사이트교토 방문이 마지막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여정은 독립운동 사적지 투어의 목적을 띠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2020년 중국 답사 이후 코로나19의 창궐과 학업 수행으로 인해 해외여행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매 방학 때마다 해외여행을 계획했지만,번번이 계획에만 그쳤다.이제 개강하면 또 미뤄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어디로든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준비하면서 어느새 구글맵에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적지들을 체크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그렇게 교토에 도착한 첫날,침착맨 카지노처음 찾은 장소가 바로 '귀무덤(耳塚)'이었다.
침략자의 전리품,귀무덤
귀무덤(미미즈카)은 임진왜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 백성들의 귀와 코가 매장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조선을 침략한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보고하는 차원에서 조선인들의 목을 잘라 본국에 보냈는데,목은 아무래도 부피나 무게가 크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귀와 코를 잘라 대신 보냈다 한다.그래서 귀무덤은 '코무덤'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들은 군인 뿐만 아니라 노인,아녀자 심지어 갓난아기의 코까지 베어갈 정도로 잔혹 무도했다고 한다.그중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휘하 장병들에게 인당 3개씩 코를 베어 오도록 명령했고,일본군 각 진영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직접 임명한 코 수집 전담관까지 있었다.이들이 바로 소금에 코를 절인 뒤,나무상자에 넣어 본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교토 귀무덤에는 12만 6000명의 귀와 코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임진왜란 당시 직접 참전한 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가 쓴 <조선물어>(朝鮮物語)에 의하면 "조선인의 목 18만 5738개,명나라 사람의 목 2만 9014개,합계 21만 4752개의 목을 교토 헤이안성 동쪽 대불전 부근의 무덤에 석탑을 세우고 묻었다"고 한다.이것이 사실이라면 귀무덤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명나라 사람들의 귀와 코 심지어 머리까지 묻힌 셈이다.그 숫자 역시 12만을 훨씬 웃돈다.
일본 측 문헌인 <호천기>(戶川記)에 따르면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목도 교토로 보내져 전시됐다고 한다.이에 따라 두 사람의 목이 교토의 귀무덤에 합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귀무덤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귀무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 한다.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그 귀와 코까지 베어 오도록 지시하고선,무덤을 만들어주는 모순적 행동이라니.그 자신도 죽어서 천벌을 받을까 두려웠던 걸까.
실제로 히데요시는 귀무덤이 완성된 후 이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법요식을 치르도록 했다.또 완성된 무덤이 협소하니 더 확장하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이를 두고 히데요시의 측근이었던 승려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는 적에게조차 자비를 베푸는 주군 히데요시의 덕을 칭송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귀무덤을 조성한 까닭은,그가 실제로 자비로워서 그랬다기보다는 '자비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일본 민중에 어필하기 위함이 컸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실제로 귀무덤이 완성되자 어린아이들까지도 히데요시의 공덕을 칭송했다고 한다.
또 다른 속셈도 있었다.바로 히데요시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일본을 방문했던 네덜란드인들이 귀무덤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단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외국인들에게 일본의 강성함과 히데요시의 위업을 자랑하려는 목적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히데요시 사후에도 귀무덤은 일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됐다.에도 막부는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들을 귀무덤 근처에서 접대함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귀무덤을 보도록 했는데,자신들의 무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이러한 행동은 자신들이 자행한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300주년이 되던 1898년(메이지 31)에는 귀무덤을 개수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치르기도 했는데,여기에는 일본 국민들에게 조선 침략의 의미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당시 일본은 귀무덤을 동양 평화의 상징물로 격상시키며 일본이 약소국 조선의 독립을 돕고 한·일 간의 우의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긴 역사 속에서 귀무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침략자의 전리품이자,로고 디자인 참고 사이트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상징물로 활용돼왔던 것이다.
심지어 귀무덤 옆에는 미미즈카공원(귀무덤공원: 耳塚公園)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놀이터가 조성되어 아이들이 뛰놀고,동쪽으로 140m 부근에는 히데요시를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임진왜란 종전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적국의 땅에 남겨진 채 조롱 받고 있는 조선 백성들의 영혼을 생각하면 가련하기 짝이 없다.
조선인들의 넋을 기리고자 선택한 술
귀무덤을 보러 가는 길,빈 손으로 가기 뭐해서 편의점에 들렀다.주류 코너에 가니 사케와 일본 맥주,위스키들이 즐비했다.외국 술,토토 사이트 목록 베스트 온라인 카지노슬롯보증특히 일본 술을 올리자니 찝찝해서 고민이었는데 다행히 '한국 소주'가 눈에 띄었다.그중에서도 청포도맛 과일소주를 한 병 골랐다.이육사 시인의 <청포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청포도를 통해 자유와 독립,평화를 갈구했던 이육사 시인처럼,나 역시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들의 넋을 위로하고,한·일 양국 간의 진정한 우의를 기원하고 싶었다.
귀무덤에 도착하니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안전 관리를 위해 잠가놓았다고는 하는데,뭔가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참배를 원하면 사전에 연락 달라는 교토시 문화재보호과의 안내 문구와 연락처가 적혀 있었지만,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현지 시청에 전화를 걸어 문을 개방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 자체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터.그저 한국인들의 참배를 막기 위한 꼼수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7년 전 첫 방문 당시에도 굳게 잠긴 철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는데,이번에도 결국 '입구컷'을 당했다.아쉬운 마음으로 입구에서 서성이는데,문 바로 뒤에 놓인 꽃다발이 눈에 띄었다.아마 나처럼 문을 넘지 못했던 누군가가 놓고 간 모양이다.
나 역시 아쉬운 대로 철문 앞에서 청포도 소주를 부어올린 뒤,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 당시 피로 쓴 '대한독립 태극기'를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당신들의 후손이 이렇게 찾아와 태극기를 휘날리며 올린 소주 한 잔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며.
※ 귀무덤 주소(구글맵): 533-1 Chayacho,Higashiyama Ward,Kyoto,605-0931 일본
덧붙이는 글 | 귀무덤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노성환,「교토의 귀무덤에 대한 일고찰」,『동북아문화연구』 18,동북아시아문화학회,2009'를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서술했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