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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결혼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놀랍게도 아주 최근에 탄생한 것이다.낭만적 사랑,안정된 가정,정열적 섹스를 모두 결혼에서 찾으려는 근대인의 환상은 대부분 실망으로 귀결된다.계엄 사태로 묻히기는 했지만,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혼외 자녀가 사회적 이슈였다.도덕적 비난이 주류인 가운데,프라이버시라는 반론도 있었다.이 기회에 결혼을 주제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결혼은 위험한 주제다.어떻게 다뤄도 욕먹기 십상이다.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결혼만큼 중요한 제도도 많지 않다.근래 결혼제도를 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니 위험하다고 피하기만 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여기서 혼외 자녀나 결혼제도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결혼이란 어떤 제도인지,근래 이 제도가 왜 자주 문제가 되는지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결혼제도는 생물학적 번식 본능을 뛰어넘는 인간만의 특징이다.©연합뉴스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결혼제도는 생물학적 번식 본능을 뛰어넘는 인간만의 특징이다.©연합뉴스


지구상의 많은 동물이 양성생식으로 번식한다.암수가 만나 정자와 난자를 제공·결합하여 자식을 만든다는 뜻이다.번식은 생물에게 너무나 중요한 과제다.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는 것이야말로 모든 생명이 가진 궁극의 목표라고 주장한 바 있다.그렇다면 번식이야말로 최선의 전략을 따라야 한다.결혼은 인간의 번식과 밀접하게 관련된 제도다.최선의 번식이란 무엇일까?최고의 상대를 구하여 최대한 많이 번식하는 것이 아닐까?나아가 자식이 다시 최선의 번식에 성공하는 것이리라.한 개체가 최선의 번식에 성공하고 죽음을 맞이하면,적어도‘이기적 유전자’의 시각에서는 만족스러운 삶이라 할 수 있을 테다.

동물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하지만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순간 논란이 일어난다.당연한 이야기지만,인간도 동물이다.인간도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수정란을 만들고,수정란의 세포분열로 아이가 형성되고,다른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인간의 유전자도 이기적이니 최선의 번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결혼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면 (마음이 불편하지만) 인간도 동물의 하나라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그렇다면 결혼,즉 장기적인 일부일처제는 어떻게 인간 짝짓기의 표준 양식이 된 것일까?아직 이 질문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답은 없으니 그럴듯한 추측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수렵채집 시대의 가족은 군혼(群婚)이었다고 한다.집단 내 구성원이 모두 서로의 남편이자 아내였다는 것으로,지금의 시각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형태이다.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이후 긴 세월을 거치며 부모 자식,형제자매 간의 성관계,즉 근친혼이 금지되는 가족의 형태가 자리 잡는다.이 경우 족외혼을 해야 하니 외부 집단과의 교류는 불가피하다.선사시대 사람들이 다른 집단과 평화롭게 공존한 것은 아니었지만,때로 자원을 공동으로 이용할 정도의 협력은 필요했다.항상 이동해야 하는 수렵채집 집단의 경우,잉여물자 축적이 불가능하다.식량이 부족하거나 수렵채집 활동에 도움이 될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다른 집단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된 (그래서 선사시대와 다름없는 삶을 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들은 가혹한 환경의 사막에서 살아왔다.이들은 다른 부족과의 결혼동맹을 통해 어디를 여행하든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이때 부족의 장로가 결혼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며,이 결정에 개인이 저항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못한다.이 사례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듯이,선사시대 결혼은 낯선 외부 집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세습을 위한 가부장 남성의 해결책

농업이 시작되자 결혼에 변화가 일어난다.이제 수렵채집인은 정착하게 되고,복권 도박 차이인구 증가는 물론,잉여 산물이 생긴다.잉여 산물은 사유재산이 되고,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계급도 탄생한다.이들은 주로 무력을 가진 남성이었다.이렇게 가부장적 사회가 정착되어간다.가부장 남성은 사유재산을 자식에게 남겨주길 원했고,이를 위해 여성을 억압하게 된다.여성은 직접 아이를 출산하므로 자식이 누구인지 헷갈릴 이유가 없다.하지만 남성은 자식이 진짜 나의 아이인지 확신하기 힘들다.여성의 성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정절을 강요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가부장 남성의 해결책이었다.

농사짓는 모습이 그려진 고대 이집트 고분의 벽화.©Flickr
농사짓는 모습이 그려진 고대 이집트 고분의 벽화.©Flickr


이제 결혼은 상류계급에서 지위를 세습하고 부를 상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가 되었다.결혼이 일종의 경제적 계약이었다는 뜻이다.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결혼은 중요했다.농업은 엄청난 양의 노동을 요구했는데,가족의 도움은 물론 부부간의 생산 분업 없이 생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특히 여성은 보조적 노동과 집안일을 해야 했으며 노동력 확충을 위해 가급적 많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평범한 사람에게도 재산 상속은 중요한 문제다.가부장제이므로 재산은 합법적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이런 결혼에서 일부일처제는 재산 상속과 관련한 합법적 자식을 결정하는 데 필요하다.경제력이 있는 전근대의 남성은 다수의 아내를 두었지만,일부일처제의 합법적 아내의 자식만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이처럼 전근대 시대의 결혼은 경제적 계약에 가까웠던 터라 부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결혼은 남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의 결합,좀 더 정확히는 사회경제적 결합이었다.이런 형태의 결혼제도는 생물학적 번식 본능을 뛰어넘는 인간만의 특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동아시아에서는 부부간의 사랑보다 부모 자식,혹은 형제자매 사이의 사랑을 더 중요시했다.부부간의 지나친 사랑은 비난의 대상이었다.서구에서도 부부간의 사랑은 필수적 요소가 아니라 보너스로 여겼다.실제 당시의 많은 이들이 결혼제도 바깥에서 사랑을 찾고 아이를 낳았다.

집안 동의 없는 결혼 가능해진 이유

근대가 되자 결혼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사랑이 결혼의 전제가 된 것이다.서양에서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상은 17~18세기 널리 퍼졌다.르네상스로‘개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강원랜드 블랙잭 룰인쇄술의 발전으로 로맨스를 다루는 책들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집안의 동의 없이 사랑만으로 결혼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필요했다.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발전으로 생겨난 임금노동과 도시화 덕분에 가족의 도움 없이 부부의 힘만으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핵가족의 탄생이다.계몽주의는 강제 결혼보다 사랑에 기반을 둔 자발적 결혼을 옹호했다.이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시작했다.이처럼 사랑이 결혼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놀랍게도 아주 최근에 (서양에서는 200여 년,한국에서는 100여 년 전쯤) 탄생한 것이다.

근대인은 낭만적인 사랑,안정된 가정,정열적인 섹스,모두를 결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나아가 현대의 낭만적 사랑은 대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인 경우도 많다.낭만적 사랑을 하는 데는 종종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사랑은 도파민에 의한 단기간의 흥분,이어지는 권태와 질투,의심과 슬픔을 포함하는 복잡한 현상이다.하지만 낭만적 사랑은 긍정적인 면만 부각하며 우리를 기만한다.

전근대 사람들은 결혼에서 사랑을 기대하지 않았다.결혼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였다.그러니 사랑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었다.하지만 근대인에게 결혼은 사랑이다.문명이 시작된 이래 결혼은 사랑과 직접적 관계가 없었지만,지금 우리는 결혼에서 사랑을 찾는다.여기서 현대 결혼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그렇다고 부부 사이에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서로 사랑하며 사는 부부도 많다.하지만 우리는 결혼제도와 사랑을 조화시킬 최고의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2022년 2월16일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씨.©EPA
2022년 2월16일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씨.©EPA


생물학적으로 원시 인간의 짝짓기는 일부다처제로 추측되지만,인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일부일처제 결혼이 표준이다.여기에는 경제적 계약 말고도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참고로 포유류 가운데 일부일처제인 경우는 흔치 않다.일부일처제가 아니었다면,짝을 원해도 찾지 못하는 남성이 많을 테니 사회가 불안정해질 것이다.소규모 집단을 이루는 일부다처제의 고릴라나 바다표범이라면 모를까,대규모 협력이 필요한 인간 사회에서 이런 불안정성은 사회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농업혁명 이후 가부장제를 지탱하던 남성의 무력은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생존에 유리한 능력이 아니다.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사회적 권력도 강해져가는 지금,결혼제도가 탄생할 때 중요했던 가부장제는 점점 빛바랜 신화가 되어가는 중이다.장자상속 원칙도 무너지고,사랑을 기반으로 한 근대 결혼의 이상도 도전받고 있다.이제 이혼은 놀라운 일이 아니고,점점 더 많은 이들이 미혼으로 살아간다.인간의 번식이 결혼제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인류가 적정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근대가 되며 결혼에 로맨틱한 사랑이 결합하여 혁명이 일어났다.그 혁명은 아직 진행 중이다.

※ 참고 도서

〈진화하는 결혼〉 스테파니 쿤츠 지음,김승욱 옮김,작가정신 펴냄 / 〈결혼의 종말〉 한중섭 지음,파람 펴냄 / 〈일부일처제의 신화〉 데이비드 P.버래쉬 외 지음,이한음 옮김,해냄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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